[9] 1960년대의 한국영화
사실 1960년대 초에 들어서도 광복 이후의 영화 조류가 달라지는 기미가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관만 하더라도 광복 전이나 후나 별다름 없이 과거에 있어온 것들 뿐이었다. 서울의 경우 가장 역사가 오랜 종로의 단성사(團成社)를 비롯해서 수도극장, 국도극장, 중앙극장, 국제극장, 동양극장, 계림극장, 대한극장, 우미관, 문화극장, 동화극장, 동도극장, 광무극장, 미도극장, 서대문극장, 화양극장, 성남극장, 영보극장, 키네마(아카데미극장), 초동극장, 명동극장, 명보극장 등 스물 대여섯개의 영화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영화관은 과반수가 일제 때부터 있어온 극장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가 한국을 착취하는 데는 매우 입체적 접근을 꾀했었는데, 그 중에서 극장업(흥행업)도 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땅을 빼앗아갔고 미곡증산정책이라 하여 곡식을 거두어 갔으며 동양탁식주식회사를 만들어 고리대금업도 했다. 그 뿐이 아니라 극히 사적인 것이긴 했어도 일본인들은 조선 땅 곳곳에 영화관을 세워 대중의 주머니 돈 뿐만 아니라 예술인을 착취한 것이다. 소위 흥행업이라는 것이 주로 그들의 영화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광복 전까지 이 땅에 있었던 영화관은 대체로 185관 정도였다. 각 시도마다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일본인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영화관들은 모두 적산가옥이 되고 영화관과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 접수한 것이다. 이 말은 곧 새 영화관 주인들이 영화예술인들이 아닌 흥행업자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영화관들이 운영되었고 광복 이후 새로 만들어진 영화관들도 거의가 비슷한 자본주들이었다. 따라서 영화관들은 예술보다는 흥행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고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외국영화를 수입 방영하는 식이었다. 더욱이 미군정 시절 미국의 힘에 의해서 미국영화가 시장을 압도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예술성 등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는 국산영화는 서양영화에 압도되어서 변두리를 전전하는 서글픈 존재였다.
그러자 정부가 1961년에 국산영화를 보호 육성한다는 명분하에 영화법을 만들어 공포한 것이다. 이 영화법의 핵심은 영화사의 등록제였는데 이는 외화수입에 의존하는 무자격 영화사들을 정비한다는데 주안점이 있었다. 따라서 군소 영화사들이 대부분 문을 닫거나 통합하게 되었다. 시설과 인적 자원을 확보해야 되므로 수입에 의존하던 영세업자들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영화법은 당초의 명분과는 달리 영화업자들의 목을 조이는 악법으로 영화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인들이 계속 반발했고 그때마다 정부는 시행령을 조금씩 고쳤지만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1964년 영화인들이 영화법폐기촉진회까지 만들어 정부에 대항한 것이다. 영화인들이 영화법을 폐기시켜야 된다고 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항목에서 였다.
「① 제작자금도 부족한 현실에 불필요한 시설 확장을 반대한다.
② 영화법은 부정등록자를 옹호하고 부패를 조장하고 있다.
③ 우리 영화의 발전과 향상은 양보다 질에 있다.
④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⑤ 현행 영화법을 즉시 폐기하고 영화제작진흥법(가칭)을 입법하길 호소한다.」
이상이 영화인들이 국회, 정부 등 요로에 건의한 영화법 폐기안이었는데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영화법의 근본 취지가 한국영화의 보호 육성이었던 만큼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부정적 요소는 앞에 열거한 다섯 가지 즉 영세한 영화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 것과 또 검열의 강화에 있었다. 물론 영화검열은 광복 직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윤리위원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한국문화예술 탄압의 악법이 모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아 많이 완화되었지만 군사정부에 의해서 다시 강화된 것이다. 시나리오의 사전 검열과 필름의 심사가 그것인데 특히 이데올로기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그리고 외설과 같은 도덕적인 기준이 엄격해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영화작품들이 상영금지되거나 또는 입건되는 수난을 겪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긍정적 요인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국산영화 제작이 늘어났고 외국수입이 감소된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화와 국산영화의 불균형이 그런대로 잡혔다는 이야기가 된다. 1965년에 개정된 영화법에 의해 외화 수입이 크게 억제됨으로써 정부가 당초 목표했던 한국영화의 정착이 조금씩 자리잡혀 간 것이다. 이영일(李永一)이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60년도부터 1970년도 국산영화 제작 편수가 87편에서 79편(1961년)-112편(1962년)-148편(1963년)-137편(1964년)-161편(1965년)-172편(1966년)-185편(1967년)-195편(1968년)-229편(1969년)-231편(1970년)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영화법이 그 당시 영화계 실정에서는 무리한 요구의 법이긴 했어도 긍정적 측면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냐 하면 나름대로 국산영화의 자생력이 살아나는데 조그만 계기도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몇 번에 걸친 영화법 개정이 그런 도움을 준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스크린 쿼터제의 실시라 하겠다. 이 말은 영화관들이 연간 며칠간 반드시 국산영화를 방영해야 하는 의무조항을 지켜야 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는 대략 석달 정도였다. 게다가 외화수입 쿼터제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산영화 제작붐이 일어난 것이다. 외화수입권을 얻기 위한 졸속 제작 현상까지 나타남으로써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우수영화 선정 심사에 따르는 부작용은 영화계의 부패현상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정실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비전문가들까지 작품심사에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부작용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1960년대는 우리 영화가 크게 발전하는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던 점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그 첫번째가 대량생산이다. 앞에서도 조금 언급한 것처럼 연간 200편 이상을 제작한 것은 영화사상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처음이었다. 우리 나라의 영세한 영화사업의 수준으로 볼 때 연간 200편 이상의 제작은 무리였던 것이다. 더욱이 영화인, 이를테면 연출가를 비롯해서 배우, 촬영, 녹음, 기사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200편 이상의 제작은 조악(粗惡)한 작품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예술은 사람이 만드는 것으로 돈이 있다고 예술작품이 저절로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풍부한 인적 자원의 토대 위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 점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인적 자원 속에서 200편의 작품제작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사람의 감독이 몇 편의 작품을 만들고 겹치기 출연 등으로 영화미학(映畵美學)을 훼손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두번째로는 소위 문예영화(文藝映畵) 붐이 일어난 점이다. 즉 작품양산 속에서도 수작이 적지 않게 등장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소설 · 희곡 각색물인 문예영화였다. 가령 1961년 유현목(兪賢穆)감독의「오발탄」(이범선 원작 소설)을 시발로 해서 신상옥(申相玉)감독의「사랑방손님과 어머니」(주요섭 원작 소설)와「상록수」(심훈 원작 소설)「벙어리 삼룡이」(나도향 원작 소설), 유현목감독의「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원작 소설)「잉여인간(剩餘人間)」(손창섭 원작 소설)「순교자」(김은국 원작 소설)「막차로 온 손님들」(홍성원 원작 소설)「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원작 희곡) 등이 주목을 끌었다.
또한 김수용(金洙容)과 이만희(李晩熙), 최하원(崔夏園), 이성구(李星究), 김강윤(金剛潤), 이형표(李亨杓), 이봉뢰, 최무룡(崔戊龍), 김진규(金鎭奎), 김기영(金綺泳) 감독 등이 1960년대 문예영화붐을 일으킨 연출가들이다. 즉 많이 만든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던 김수용은「혈맥」(김영수 원작 희곡)「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수기)「산불」(차범석 원작 소설)「안개」(김승옥 원작 소설)「시발점」(이청준 원작 소설)「봄봄」(김유정 원작 소설)「갯마을」(오영수 소설)「피해자」(이범선 소설) 등 8편이나 감독했고, 이만희는「물레방아」(나도향 원작 소설)를 비롯하여「만추」(김지헌 극본)「싸릿골의 신화」(선우휘 원작 소설) 등을 감독했으며, 이성구는 1960년대 후반에「일월」(황순원 원작 소설)「메밀꽃 필 무렵」(이효석 원작 소설)「젊은 느티나무」(강신재 원작 소설)「장군의 수염」(이어령 원작 소설)「지하실의 7인」(윤조병 원작 희곡) 등을 감독했다. 그리고 김강윤과 이형표는 각각「역마」(김동리 원작 소설)와「절벽」(강신재 원작 소설)을 감독했고 최하원과 이봉뢰는 각각「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 원작 소설),「독짓는 늙은이」(황순원 원작 소설)와「성난 코스모스」(김경옥 각본)「장미의 성」(차범석 원작 희곡) 등을 감독했다. 그 외에도 최무룡감독이「서울은 만원이다」(이호철 원작 소설)를, 김진규감독이「종자돈」(김용익 원작 소설) 등을 연출하여 주목을 받았다.
영화감독들이 선택한 소설과 희곡은 대체로 일제 때에 발표된 작품들보다는 광복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 많았다. 가령 광복 이전 작가들의 경우는 나도향을 비롯하여 이효석, 심훈, 김유정, 주요섭 정도였고 광복 이후에 낸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는 유치진, 김영수, 김진수, 차범석, 윤조병 등 극작가와 황순원, 김동리, 선우휘, 이범선, 손창섭, 이호철, 강신재, 이어령, 김용익, 홍성원, 오영수, 이청준 등 12명의 소설가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12명 중 김용익은 해외에 거주하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단편소설이 많이 영화화된 것이 특징인데, 주제는 역시 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전후의 정신적 피폐를 휴머니즘의 각도에서 다룬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영화감독이 가장 선호한 작가는 황순원과 이범선, 오영수 등으로서 역시 토속성이 짙고 전쟁의 상처를 휴머니즘으로 따뜻이 감싸 안는 내용의 작품을 쓴 소설가들이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960년대 이전에도 소설이나 희곡이 영화화된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가령 정비석의 신문연재소설「자유부인」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흥행을 앞세운 경우였고 영화예술의 격조를 높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일어난 문예영화 붐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이 빈약한 시나리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수한 소설이나 희곡에서 작품을 찾은 것이다. 그 결과 국산영화의 질이 급격히 상승했음은 두말할 나위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번째 발전 요소로서 시네마스코프의 등장도 한 몫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영화는 다른 공연예술과 차이나는 것이 과학의 산물인 점일 것이다. 물론 연극이나 무용같은 것도 조명이나 음향 또는 무대장치 등에서 과학의 힘을 빌지만 영화만큼 전적으로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20세기 예술인 것도 바로 그런 과학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비례해서 영화도 발달하는 것은 자명하다. 가령 소형영화로부터 대형영화로, 또 흑백에서 천연색 영화로 발전해온 것도 그러한 과정의 수순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천연색으로 바뀜으로써 관중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곧바로 관객 확대로 연결되었다. 우리 영화가 완전히 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바뀐 것이 바로 1960년대 말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대중이 무한대로 몰리지 못하게 만든 것이 텔레비전의 보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회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것이 언제나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여하튼 1960년대는 군사정권 아래에서도 우리 영화가 질량(質量)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대였다. 전체적 작품 경향은 문예영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대중 취향의 하이 코메디물이라든가 역사극 · 멜로드라마 · 스릴러물 등이 판을 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가령 1960년대 히트작으로 정소영감독의「미워도 다시 한번」같은 영화는 장안의 선남선녀를 울린 대표적 멜로드라마의 표본이었고, 정통 역사물은 아니지만 신상옥 감독의「성춘향」같은 고전영화도 역시 인기 작품 중의 하나였다. 당대의 스타 신성일 · 엄앵란 콤비의 청춘영화 붐도 1960년대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김기덕감독의「맨발의 청춘」이라든가 정진우감독의「초련」같은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한편 1960년대 청춘영화의 작품경향을 살펴보면 우선 전후의 세대가 기성의 세대와는 달리 뚜렷한 제네레이션으로 성장했다는 자각과 이러한 자각이 그들의 생활현실이나 사회현실과의 갈등에서 오는 일종의 프라스트레이션을 심리적인 패턴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프라스트레이션이 여러 가지의 행동양식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사랑에 있어서나, 기성세대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또는 스스로의 윤리감정이나, 미래에의 상승 욕구에 있어서도 대개 비슷한 타입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젊은 열풍이었다.
」
이상과 같이 1960년대의 청춘영화는 전후 세대의 새로운 도덕률과 사랑의 방식을 뚜렷이 보여준 것이었다. 청춘영화붐에 따라 새로운 스크린의 스타들이 부상되기 시작했는데 신성일 · 엄앵란을 필두로 해서 고은아 ·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등이 그 대표적 스타였고,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트로이카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또 하나 기록될만한 행사로서는 우리 영화가 쉰 살을 먹는 해(1969년)가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영화사가(映畵史家)들은 초창기 신파극의 악역배우였던 김도산(金陶山)의 극단 신극좌가 제작한 연쇄극「의리적 구토」(1919년)로부터 출발점을 찾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연쇄극(連鎖劇)은 연극과 영화를 조화시킨 키노드라마이다. 당시 신파연극인들이 인기있는 영화를 따라하기 위해서 연극에 영화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형태가 연쇄극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외국의 활동사진이 우리 나라에서 유행했었지만 한국인이 직접 촬영한 것은「의리적 구토」가 처음이었으므로 거기서부터 계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69년도에 한국영화 50년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이영일(李英一)의『한국영화전사』(삼애사 간)도 출간되었다. 영화사가 한국영화가 시작된 지 50년만에 비로소 정리된 것이다.[서울시육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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