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비친 인천상륙작전
仁川愛/인천이야기
2010-04-03 22:40:18
스크린에 비친 인천상륙작전
글 조우성 시인,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인천상륙작전의 배경은 단순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해 왔고, 개전 41일 만에 낙동강 이남을 빼놓은 전 국토를 함락시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신생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판이었다. 북한군은 “적들을 일층 무자비하게 소탕하라. 부산과 진해는 지척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고, 앞으로! 앞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최후의 일전에 벌였다. 그 국파(國破)의 경각지세에 나라와 국민을 살리는 길은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뿐이요, 그를 위해서는 옛 병법(兵法) 그대로 적의 늘어진 보급로를 끊어 협공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요체였던 것이다.
개전에 앞서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따라 인천 앞바다에 포진한 유엔군 함대의 모습은 세기의 장관이었다고 기자들은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러나 조수간만의 차가 8m에 달하는 인천항의 조건은 작전 수행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오히려 작전을 용이케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작전의 아이러니였다.
미국의 여기자 마가렛 히긴스(1951년 퓰리처상 수상)는 “작전에 참여한 함정은 총 2백60척이었다. 거대한 함포사격이 48시간 동안 집중되었다. 첫 번째 상륙지점은 월미도로 새벽에 이뤄졌다. 오후 5시 30분에는 인천의 심장부인 레드비치에 올랐다. 세 번 째 상륙지점은 인천 남쪽 해안인 불루비치였다.”
“월미도에는 거대한 산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부둣가의 건물들도 화염에 싸였다. 뿌연 연기 속에 바라다 뵈는 인천 시가는 불길 속에 있는 듯 보였다. 북한군의 조준은 정확했다. 머리 위로 총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6명의 해병들이 총에 맞고 나뒹굴었다.”며 위급한 당시의 전황을 그의 저서 ‘워 인 코리아’에서 밝히고 있다.
같은 시각,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 석바위 언덕머리에서 멀리 중구 해안가의 상륙작전을 목도하고 있던 문학평론가 김양수 선생은 그날의 숨 막히는 상황을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란 책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곳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쉬고 있었다. 모두 바다를 가득 메운 유엔군 함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11시경이었다고 짐작되는데, 그라만 전투기 편대가 새까맣게 하늘을 날며 인민군 포대가 있는 윌미산과 도원산 정상에 기관총을 퍼부었다. 12시. 함포가 굉음을 내며 ‘히타치’에 떨어졌고, 시내 쪽으로 작은 폭탄들이 우박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발사됐다. 소래 쪽으로 피했다가 이틀 뒤 시내의 집으로 돌아왔다. 시내에 들어서니 집들이 모두 불탄 게 아니었다. 포탄은 군사시설에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화재가 났을 뿐, 시내의 모든 민가가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그날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 제226독립 해병연대, 제918포병 연대 등과 혈전 끝에 밤중이 되서야 인천 해안가에 상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을 두고 시내 도처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하는 참혹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미 국무성 소속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원로 사진작가 임응식 선생은 회고록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에서 “낮에는 시내에 나왔다가 밤에 배로 돌아가는 생활을 계속 했다. 9월 24일에야 비로소 평정을 찾았다.”고 생전에 증언한 바 있다.
북한군은 결국 패주하면서 부평, 김포, 여의도 방면에서 계속 저항해 그로부터 나흘 뒤인 9월 28일에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우리 해병대 용사들이 중앙청에 감격의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이것이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인천상륙작전의 단편적 한 모습이다. 그러나 동족 잔상의 참상을 삭이기에는 실로 많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상처가 쉬 아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겪은 전쟁인 ‘인천상륙작전’을 처음 영화화 한 것은 이만희 감독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은 당대 일급 배우인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김운하, 독고성, 전계현 등이 출연해 전쟁 중의 휴머니즘과 전우애 등을 다루고 있는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분대원 42명 중 단 2명만이 생존해 ‘영영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됐다는 스토리다.
대종상 영화제(1964), 청룡영화상(1963)에서 감독상 등을 휩쓸었고, 그 무렵 22만여 명이 관람하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전쟁영화의 규준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북한군과 함께 중공군을 주적으로 부각시켜 주목을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에 조긍하 감독의 동명 ‘인천상륙작전(1965년)’이 있다.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의 전투 신을 재현한 것으로 화제가 됐었는데, 신영균, 김혜정, 윤일봉, 장동휘, 허장강, 황해 등이 출연했다.
6ㆍ25전쟁 중 유엔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잠입한 북한 여간첩(김혜정)이 정보장교 신 대위(신영균)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북한군에 역정보를 흘려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게 한다는 줄거리다.
인천상륙작전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는 1969년에 개봉된 ‘결사대작전’이었다. 박노식, 장동휘, 허장강, 황해 등이 출연했다. 상륙작전을 앞두고 팔미도 등대를 탈환해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해병대원들의 비화를 소개한 것이다. 현지 로케 등을 통해 사실감을 주고 있지만 실제로 팔미도에 잠입했던 켈로 부대원들의 활약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픽션이었다.
북한도 그들의 입장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월미도(1983년)’를 만들었다. 원작 소설 ‘불타는 섬’을 각색한 이 영화는 월미도 주둔 부대의 중대장과 통신수를 통해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녀 전사’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중대장 리태훈이 직사포 4문으로 미군 5만 대군을 상대로 3일간 월미도 앞바다를 막아 북한군의 전략적 후퇴를 성과적으로 보장했다’는 등 역사적 진실과는 동 떨어진 내용이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상영이 안 된 인천상륙작전 소재 미국 영화가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왕년에 첩보영화 ‘007시리즈’를 감독했던 테렌스 영 감독이 명우 로렌스올리비에와 인기여우 재클린 비세트, ‘도망자’의 데이비드 잔센, 한국인 배우 남궁원 등 초호화 배역진을 동원해 크랭크 인 한 것이 1981년이었다.
‘오, 인천(Oh, Inchon)’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5년간 제작비 4천410만 달러를 투입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보통영화’였다. 칸 영화제에서 140분짜리 영화가 상영되었지만 혹평을 받아 105분으로 재편집해 개봉했으나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직ㆍ간접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에 ‘아벤고 공수군단(1982년ㆍ임권택 감독)’, ‘블루하트(1987년ㆍ강민호 감독)’ 등이 있으나 인천 시민들이 몸소 겪은 전쟁의 실체적 진실을 형상화한 영화는 아직 탄생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일 것 같다.
그 동족상잔의 참상 속에서 우리 선대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60년이 된 오늘 아직도 역사를 역사로 기록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또 훗날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기록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전쟁 체험자들의 구술, 각종 문서와 시각 자료의 수집과 보존, 각국에서 흩어져 있는 전사 자료의 발굴 등등을 통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혀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인천상륙작전 60주년을 맞는 우리들에게 부과된 역사적 책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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