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月華 土月會의 名女優로 아득한 옛날에는 尹白南氏의 「月下의 盟誓」를 비롯하야 「海의 悲曲」이래 극단까지 조직하얏든 여걸(?), 지금은 上海 어느 카페에서 땐써로 뚱뚱한 몸이 아조 절구통 같이 팽대해 젓다는 소식을 전한다. #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잡지명동광 제23호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필자 沈熏
모작기(模作期)의 개막(開幕)
한때 활기를 띠던 키노 · 드라마시대가 종막을 내리고 있을 무렵에 윤백남(尹白南)이 감독한「월하(月下)의 맹서(盟誓)」라는 극영화가 제작되었다. 비록 조선총독부의 시책영화(施策映畵)로서 저축장려를 주제로 한 소품이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우리 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극영화인 만큼 그 의의는 적지 않았다.
이 작품의 남자배우로는 권일청(權日晴) · 문수일(文秀一) · 안민세(安民世) · 송해천(宋海天) · 김응수(金應洙) 등이 출연하였고, 여자배우로는 이월화(李月華)가 주연으로 출연하므로써 한국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다. 이 작품은 1923년 1월에 완성되어 전국으로 무료 순회상영되었다.
이 무렵 서울에는 본격적인 영화상설관이 세워졌다. 우선 한국 사람을 위한 극장으로는 단성사(團成社) · 조선극장(朝鮮劇場) · 우미관(優美館)이 있었고 일본인의 영화관으로는 송죽계(松竹系)의 황금좌(黃金座), 일활계(日活系)의 희악관(喜樂館), 제국키네마계의 대정관(大正館) 등이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는 보래관(寶來館)과 상생관(相生館)이 있었고 평양에는 평안극장(平安劇場)과 가무기좌(歌舞伎座) 등이 있어 본격적으로 극영화를 제작하려는 기운이 도처에서 고조되었다. 또한 흥행적인 여건도 점차 성숙되어 갔다.
그러나 방대한 재정적 뒷받침의 필요로 당시의 한국인이 진출하기는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희악관을 경영하던 일본인 조천증태랑(早川增太郞)이 영화제작을 시도하였다. 그는 1923년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를 세우고 우리의 고전인「춘향전」을 자기의 호(號)인 고주(孤舟)로 각색 감독하였다. 이도령 역에는 조선극장소속 미남변사인 김조성(金肇聲)이, 춘향 역에는 미기(美妓) 한용(韓龍)이 분(扮)하였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극영화를 일본인이 제작하자 민족적인 대결의식을 촉발케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박승필(朴承弼)은 1924년 단성사에 촬영소를 설치하여 동아일보사주최인 「전선(全鮮)여자올림픽대회실황」이란 기록영화를 제작 공개한 다음 장화홍련전을「순수한 조선사람만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기획 제작하였다. 촬영은 이필우(李弼雨)가 담당하였고 각색 김영환(金永煥), 감독 박정현(朴晶鉉) 등 모두 한국인의 단합된 힘과 기술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신문도「고심 끝에 순수한 조선영화극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비록 영화의 스케일이 웅대하지는 못하였으나 사진 전편을 통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었고……」
[註3]
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순수한 의미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이며 한국영화의 독자적 가능성을 입증해 준 시금석이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또한 제작자 박승필과 작품 장화홍련전의 한국영화사적 위치가 재발견된다.
한편 조천고주(早川孤舟)의「춘향전」의 흥행 성공으로 재부(在釜)일본인 명출기일(名出奇一)은 1924년에 공칭(公稱) 20만원으로 부산조선키네마주식회자를 창립하여「해의 비곡(悲曲)」이라는 저속한 치정물을 제작 발표하여 그 퇴폐성 때문에 큰 수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 영화에는 당시 부산공연 실패로 머물러 있던 무대예술연구회원들이 대거 출연하였는데 남자주연에는 안종화(安鐘和), 여자주연에는 이월화가 각각 맡았다. 연출은 일본인 고좌관장(高佐貫長)이 왕필열(王必烈)이란 한국명으로 이를 담당하였다.
「우리 영화계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중략)…일본식 저속 취미로…(중략)…일부 천박한 청년 남녀들의 추악한 치정기분(癡情氣分)을 조성시켰을 뿐…(중략)…감독은 재불재격(在不在格)
[註4]
이는「해의 비곡」에 대한 당시 일간지의 맹렬한 혹평 일부이다. 사실상 일본인들의 한국영화계 침투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동아문화협회는 3회작에서, 부산 조선키네마는 4회작에서 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서 퇴폐적인 병폐만 뿌려 놓았으나 우리의 중후한 영화인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진출 내지 배출되었다는 것은 몹시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겠다.
1924년 부산 조선키네마의「해의 비곡」에는 안종화를 비롯하여 후일의 감독인 이경손과 여배우 이채전이 데뷔하였고 1925년의 동사(同社) 2회작인「운영전(雲英傳)」에서는 한국영화의 중흥을 일으켰던 춘사(春史) 나운규가 교군(轎軍) 단역(短役)으로 진출하였으며 김우연(金雨燕)이 주연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이경손(李慶孫)이 윤백남(尹白南)을 도와 조감독으로 연출계에 진출했다.
1925년 부산 조선키네마와 결별하고 상경한 윤백남은 그와 함께 상경한 이경손 · 나운규(羅雲奎) · 김우연 · 주삼손(朱三孫 일본인, 본명 대택(大澤)) · 일본인 촬영기사 서천수양(西川秀洋)과 더불어「백남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박승필의 단성사 촬영소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첫 제작소였다. 창립작품으로「심청전」이 결정되어 나운규는 심봉사 역으로 발탁되었고 이경손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러나「심청전」(1925)의 일본수출 교섭을 하기 위해 도일한 윤백남의 귀국이 늦어지자 백남프로덕션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경손은 고려키네마를 창설하여 이광수 원작「개척자」를 제작하였다. 이는 영화사상 최초의 문학작품과의 접촉으로 의의는 컸으나 여러가지 기술적 여건으로 실패로 돌아가 결국 영화사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윤봉춘(尹逢春) · 김정숙(金靜淑) · 남궁운(南宮雲) 등이 연기자로 배출된 것은 수확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또 최초의 촬영기사이며 촬영기술분야의 개척자이기도 한 이필우가 이귀영과 함께 전후편 15롤이나 되는「쌍옥루(雙玉淚)」를 제작하였으나 역시 역부족으로 고려영화제작소마저 해산되었다. 쌍옥루는 일본인 작가 국지유방(菊池幽芳)의「나의 죄(罪)」의 번안물로서 이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과욕이었다.
이렇듯 1923년부터 1925년까지는 모방 내지 모색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원글:서울시육백년사]
[4]"무성영화 {無聲映畵} 의 중흥기" 가 기록에 빠져 있습니다.추가되는대로 등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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