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냉면과 인천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5-14 22:36:45
‘원조 외식메뉴’ 종로까지 배달
(18) 냉면과 인천
냉면이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라고 하면 이 무슨 소리인가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냉면이라면 당연히 평양이나 함흥을 떠올릴 터이니까.
그러나 냉면은 분명 ‘인천이 상품(商品)으로 개발하여 전국에 전파시킨 인천 향토음식’이라는 점이다. 냉면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항 이후, 인천항은 미곡(米穀)을 포함한 각종 물자의 출입이 늘어나고 축항 공사 같은 큰 역사(役事)가 시작되면서 외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인천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너도나도 모여들던 이른바 ‘엘도라도’였다. 특히 1910년대에는 인천항의 활황에 힘입어 일인과 내국인의 인구 유입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 같은 외지 인구의 증가는 먹고 자는 데 있어 문제가 생기는데, 이 무렵 인천에 음식업과 숙박업이 크게 융성하면서 급기야 서울보다 앞서 한국 최초의 외식업이 탄생한 것도 이면에 이런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당시 냉면은 외식업 중에서도 대표격인 음식이었다. 외식업소들이 손님의 구미에 맞게 질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양 제 고장에서 들쭉날쭉했던 내용물을 정량화하고 균질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냉면의 소문이 각지로 전파되면서 ‘인천 원조 외식 메뉴’로서 ‘인천의 향토음식’으로서 인식되게 되었던 것이다.
“냉면은 그때도 겨울음식인 평양냉면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국수와 곁들이가 비슷할 뿐 국물은 동치미가 아니라 육수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귀물(貴物)이었던 얼음덩어리가 들어있는 것이 신기했고, 사철음식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먹는 재미 사는 재미’의 구절을 통해서도 냉면의 질적 변화가 인천에서 이루어져, 인천화(仁川化)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호사가나 한량들이 인천 냉면을 먹으러 경인기차를 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나 “서울에서 한량들이 장난삼아 사정옥에 냉면을 주문했더니 자전거를 타고 종로까지 배달을 했다”는 전설(傳說)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인천 냉면은 유명했다.
특히 배달원들이 보여주던 ‘곡예’는 가히 신기(神技)라고 할 수 있었다. 스무 그릇도 넘는 냉면 대접이 들어찬 긴 목판을 한쪽 손으로 받쳐 어깨에 얹고 반쯤 옆으로 뉜 자전거를 타던 아슬아슬한 광경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인천 냉면의 명맥은 내동이나 용동 일원의 몇 군데 업소가 이어 오다가 1950년대 이후 점차 문을 닫고 말았다. 어려서 문 앞에 긴 대나무 장대를 세워 끝에 하얀 종이 술이 달린 둥근 테두리를 매달아 놓았었던 냉면집들을 본 적이 있다.
지금 남은 집은 내동 입구의 ‘경인면옥’과 숭의동의 ‘평양옥’이 있다. 경인면옥의 육수는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향수를 자극한다. ‘인천 냉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안의 ‘옹진면옥’ 숭의동의 ‘춘천막국수’ 그리고 최근에 생겨난 남동구의 한두 집이 냉면 미식가들의 입맛을 그런대로 만족시키고 있다. 동구 화평동 일대의 속칭 ‘세수대야냉면’은 정통 인천 냉면은 아니나, 이런 인천의 ‘전통 냉면 토양’ 위에서 탄생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냉면은 이처럼 인천 땅에서 처음으로 규격품 외식 상품이 되었고, 각지로 파급되어 전국 보편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까 인천은, 냉면을 정식 상품화 한 ‘음식사적 효시’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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