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 시인 김윤식이 말하는 인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6-03 13:16:54
위클리경향 > 사회
[인천 이야기]‘버려진 땅’에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변모하는 인천
2007 10/30 뉴스메이커 747호
토박이 시인 김윤식이 말하는 인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순박하게 살아온 인천 역사가 역동성의 원천
1992년. 북성동 차이나타운, 1994년. 동구 수도국산 일대, 1994년. 남구 숭의 로터리와 종합운동장 부근, 1995년 월미도 (사진 위부터)
인천 이야기라고 하면, 특히 인천의 과거 이야기라고 하면 비류 백제 때로 거슬러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풍운과 격동의 시대, 즉 개항 무렵의 일부터 말해야 할까. 물론 이 글은 역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과거라는 시대 구분이나 연대에 그렇게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인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대체로 ‘현재’의 발전을 은근히 자부하면서 그것이 미래에까지 분명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면에 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발전을 대비(對比)할 수 있는, 어려웠거나 어두웠던 ‘현재 바로 직전의 지난날’이면 여기서 원하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천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발전’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2009년 인천세계도시엑스포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들 수 있을까? 이들도 틀림없이 인천의 발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요소기는 하다. 인천공항, 인천대교 또한 인천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건설을 들면 어떨까? 이는 비류 백제 이후 인천이 세계로 도약하는, 이른바 인천 유사 이래 대역사(大役事)기 때문이다.
“조수가 11m나 오르내리는 제물포의 정박지는 낮 동안엔 질퍽거리는 진흙 뻘과 다름이 없다. 모래톱에 있는 좁은 도랑인 정박지는 현대적인 용량의 배 5척을 수용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진흙뿐이고, 마을 뒤편의 낮은 언덕은 칙칙한 고동색이었으며, 부슬비까지 뿌리고 있었지만 제물포는 예상했던 것보다 나아 보였다. <중략>
정박지에서 바라보면,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 흰색 칠을 한, 나무로 된 집들이 드문드문 불모의 언덕에 서 있었다. 이 주택가는 숲이 조금 우거진 언덕 가장자리에 불편하고 보잘것없는 영국 부영사관 건물이 있는 저지대로부터, 크고 장식적인 일본식 찻집과 정원, 신사가 있는 언덕까지 뻗어 있었다. 독일 상인의 집, 영국 교회, 언덕에 있는 코프페 주교의 초라한 선교소, 커다란 일본 총영사관, 몇몇 새로운 공공건물만 겨우 두드러져 보였다.” 이것은 18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적은 인상기다. 조금만 더 읽어보자.
초라한 토막이 전부였던 제물포의 추억
“독자들은 아마 한국인이 제물포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사실 난 그들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 거주지가 서울로 가는 큰 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마을은 그 바깥에 위치한다. 영국 교회가 서 있는 언덕 아래로부터 그 언덕을 타고 오르며, 더러운 샛길을 거쳐 닿을 수 있는 모든 암층 위에 한국인들의 토막이 꽉 들어차 있다. 주요 도로에서는 아버지들의 무기력을 본뜨고 있는 때 묻은 아이들의 조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항 10년 뒤인 1894년, 인천항에서 밀려나 일본 동네 한 구석에 얹혀살 듯하던 우리의 모습은 이렇게 조수가 11m나 오르내리는 바다 진흙 뻘과 칙칙하고 초라한 집들과 더러운 샛길을 거쳐 닿을 수 있는 토막과 무기력과 때 묻은 아이들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인천 사람의 기록을 보자. “인천 발전의 태동은 일본 세력의 강화에서 비롯했으니, 일인 거류민단과 청국(淸國) 화교들이 인천 경제를 좌우했고, 일본 세력에 붙좇던 한국인이 인천 한인 사회의 경제권을 장악한 것이다. 일본말을 잘하는 영남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진출해서 근업소(勤業所)를 창설했고, 그 다음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강화와 수원 그리고 충남의 서산과 태안이며 조선조 때 혜택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약진 분투했던 개성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울 태생과 인천 원주민의 경제 발전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이 드물었던 제물포는 점점 인구가 늘어 무역항, 상업도시,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살기 좋은 ‘제밀’이란 말이 돌아 러일전쟁 후 노동인구가 인천으로 모여들었고, 대일무역의 주종인 쌀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정미공장이 들어서 조선 말 관가에 토색당하고, 통감부 시절 이후 토지마저 빼앗긴 영세농과 소작인들이 소위 산업 예비군으로 정미소 직공이 되거나 칠통마당(옛 경기도경찰국 뒤 선창가)의 목도꾼(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이 짝이 되어 뒷덜미에 몽둥이를 얹어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일꾼)이 되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걸리 집, 선술집 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식당이 날로 발전했고, 지게꾼, 인력거꾼이 신상(紳商)들과 술잔을 드는 데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한쪽으로는 미두장(米豆場)이 생겨 서울과 호남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해산물 가공품이 대종을 이루었던 대중국 무역으로 중국인이 여러 방면에 진출했다.
” 그 무렵 산업화와 함께 외지 인구의 유입으로 정신 없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인천의 상황을 언론인이었던 고일(高逸) 선생은 이렇게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에 적고 있다. “우리 선대는 아는 것도 변변하지 못하면서 뚝심마저 없어 자기 터전인 인천을 타국인에게 내주고 더부살이로 살았다. 특히 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신분의식만 앞섰던 인천 사람-인천부사청(仁川府使廳) 관내에 살던 사람-은 타관사람이 모여서 제물포를 차지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외면한 채 지내왔다. 말하자면 인천 사람 아닌 사람들이 일본이 주동이 되어 청인과 양인이 함께 만들어 낸 제물포에서 25년이란 세월을 그들에게 얹혀 힘겹게 살면서 인천의 터를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서인지 그 후 25년을 인천부윤(仁川府尹) 밑에서 일본의 종으로 고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이것이 개항 풍경의 전모다.”
개항 후 130년간 희생해온 인천, 보상받아야
갯벌을 매립한 송도국제도시(2·4공구)의 현재 모습
‘인천 한 세기’ ‘개항 후의 인천풍경’이 두 책의 저자로 의사요 향토사가면서 우리 인천의 대표적 지성이었던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기술한 이 내용이야말로 우리 인천인의 과거를 참으로 적확하게 설명한다.
가난했던 인천, 남이 주인이었던 인천이 그 아픈 과거를 뒤로 한 채 오늘날 이 나라에서 가장 역동적(力動的)이며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대역사의 그 원동력, 그 에너지는 무엇일까. 어떤 역사의 맨 밑 뿌리에서 그런 역동을, 그런 정력을 분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신 박사가 앞의 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후세에 자랑할 만한 명분이 뚜렷한 행적은 남기지 못했을지언정 간사하고 악독한 일인과 음흉하고 잔인한 청인이 쥐고 흔들던 막막한 항구에서 이렇다 할 아무 도움도 없이 악착스럽게 뿌리를 내린 우리 선대의 공로는 우러러 받들어야 마땅하다.” “지금의 용현동 유공저유소 자리였을 것이다. 당시 POL이라고 부르던 미군 유류창을 출발한 휘발유 드럼 운반 트럭들은 옛 장안극장 위쪽 숭의동 308번지 일대를 관통하는 샛길을 통해 경인 국도로 나서는데 이 사거리에서 일단 정지를 했다가 부평 쪽으로 우회전했다. 이 길은 약 15도 정도 경사져 있어서 트럭들은 그다지 빠른 속도를 내지 않고 달렸다. 사거리에 도달하기 직전, 트럭이 더욱 속력을 줄일 무렵 골목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두 명씩 트럭에 기어오르는 것이다. 운전석의 미군 운전병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냥 앞만 보고 사라지고, 그러면 골목에서 득달같이 구루마가 나오고 드럼통은 거기에 실려 어디론지 사라지는 것이었다.”
몇 해 전에 썼던 졸고(拙稿)도 읽어본다. 1950년대, 이런 시절도 분명 우리 인천은 겪었다. 그렇다. 바로 이런 것들이 솔직한 우리 인천의 역사요, 힘이며, 저력이었다. 난센스가 아니다. 오늘 같은 인천의 발전은 진정 그 같은 눈물 나는 과거사 위에 270만 시민의 타오르는 내재의 에너지를 집합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 확실히 해야
개항 이후 1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인천은 실로 이 나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니 희생을 했다. 한 가지만 보라. 인천은 이 나라 경제 건설과 부흥을 위해, 안보를 책임지기 위해 변변한 해안선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아니 다 빼앗긴 채 살아왔다. 산업화, 공업화에 따른 희생이었고, 국토분단의 뼈아픈 선물이었다. 이제 그런 역사의 보상으로서도 인천은 도시 엑스포도 열어야 하고 아시안 게임도 개최해야 하며 송도신도시, 영종도, 청라경제자유구역의 건설을 확실한 현실로 이룩해야 한다.
인천인들은 두 팔을 펼치고, 큰 목소리로, 비류 이후 가장 눈부신 희망과 도도한 자부심을 말해야 한다. 인천의 미래를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없을 것이다. 미래는 오늘 다음에 이어진다. 하여 오늘을, 현재를 충실히 살면 그것이 미래의 답(答)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 장밋빛으로 피어 아름답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오늘의 인천 모습 위에 옛 인천의 풍경을 오버랩해보는 심사는 넘치는 행복감과, 인천에 대한 지극히 대견스러운 심정의 역설적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윤식 ㅣ 1947년 인천 출생. 제물포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 시 추천으로 등단. 현 인천문인협회장
eoeul@hanmail.net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북어. 2』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옥탑방으로 이사하다』 기타 저서 『간추린 인천사』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 『월미도 이야기』 (이상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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