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과 항왜의 전쟁터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6-25 16:29:43
항몽과 항왜의 전쟁터 인천
멀리 고려 때 몽골의 침입부터가 그랬다. 연해주를 비롯해 동유럽까지 정복했던 징기스칸이었지만 그들은 39년간 항몽의 도읍 강화에서 결국은 물러서고 말았다. 몽골군이 고려인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것은 곧 우리 선조들의 충의적 기상이 드높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절체절명의 전란 중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강화 선원사에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각을 떠 만든 팔만대장경은 호국 의지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다시한번 인천이 호국의 성지임을 웅변하였다.
그 같은 호국정신은 임진왜란 때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선조 25년 총 20여 만 명의 왜군들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한양에 다다르자 조선은 큰 충격에 빠졌다. 선조 26년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은 당시의 정황을 “한강 이남은 적의 형세가 매우 극성하여 인천, 안산, 금천 등지에는 날마다 왜적의 부대가 분탕질을 하고 더러는 밤을 타 습격하여 살아남은 백성도 적의 창칼에 다 죽어갈 형편”이라고 비통해 했다.
군사를 잃고 진(鎭)을 버린 장수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희망은 백성이었다. 몽골군이 고려인을 두려워했듯, 왜군은 조선의 관군(官軍)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했다. 인천 문학산성(文鶴山城)에서의 승리도 백성들의 것이었다. 비변사는 같은 해 12월 왕에게 “적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오직 철환(鐵丸·총알)이 있기 때문이나 산성은 대개 높이 치솟아 이것이 소용없기 때문에 인천산성과 행주산성의 싸움은 모두 지리적 험요(險要)를 이용하여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고 아뢰고 있다.
선조 29년 11월 13일자 실록을 보면 “인천산성과 수원독성(水原禿城)에서는 백성들이 들어가 지켜서 적이 감히 침공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며 전투의 주체가 백성들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포함외교 시대의 전쟁들
인천에서의 전쟁은 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로부터 인천이 해방(海防)의 요로였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국가 비상시에는 왕의 피난 ‘루트’이기도 해 인천의 방어 문제는 늘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그 같은 인천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정조 3년 1779년 3월 순심사 구선복(具善復)이 왕에게 복명한 것처럼 “예로부터 제물진은 서울로 통하는 직로”였다는 말이나 관민 모두가 ‘도성의 인후(咽喉)’로 여긴 데서도 나타나 있는데 근세에 올수록 중요성이 더하면 더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 따라 열강들도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을 거점으로 하고자 이양선을 끌고 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니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이 그것이다. 그 때마다 인천의 관민은 제국주의 열강의 총칼에 희생되었다.
1866년 프랑스군은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사건을 빌미로 인천에 침입하였다. 병인박해 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P.G. 로즈에게 보복 원정을 촉구한 결과였다.
로즈는 함대를 이끌고 와 강화를 점령하고, ‘우리는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조선군을 제압했으나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으로 전사 6명, 부상 60∼70명의 사상자를 낸 채 원정을 포기하고 거의 한달 간 점령했던 강화에서 철수하였다.
그 5년 뒤인 고종 8년 1871년에는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이는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그를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한 것이었다.
아시아함대사령관 J. 로저스는 전형적인 포함외교를 구사하였다. 1871년 4월 로저스는 군함 5척과 군사 1200여 명을 이끌고 통상을 요구하다 강화 손돌목에서 포격전을 벌였다. 사건 직후 미국은 포격에 대한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미국이 주권을 침해했다며 협상을 거부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군은 다시 초지진을 공격하였고, 덕진(德鎭)과 광성진(廣城鎭)을 점령하였다. 특히 광성진 전투는 치열하여 조선측은 전사 350명, 부상 20명를 낸 반면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여 명에 불과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에 부닥쳐 개항을 단념하고 철수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75년 9월에는 또 일본 군함 운양호가 해안 탐측을 구실로 강화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입했다.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함포를 쏘며 응전했고, 영종진에 상륙해서는 살육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이는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제기된 정한론(征韓論)과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당한 역사적 경험을 그대로 본 뜬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하며 수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인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1883년 인천을 개항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 침탈의 전초전이자 일본 제국주의가 앞날에 저지른 대륙 침탈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제물포 해전과 인천상륙작전
그렇듯 인천은 개항 전야에 열강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인에게 각인시켰던 것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과 러시아와 일본이 팔미도 앞바다에서 싸운 ‘제물포 해전’에 의해서였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천대전(千代田·치요다)호 등 8척의 군함을 앞세워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2척과 상선 1척의 퇴거를 강요했고, 이에 러시아가 불응하자 이튿날 오전 양측은 팔미도 해상에서 포격전을 벌였다.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 측은 이날 오후 소월미도 해상에서 모두 자폭하고 말았다.
사실 제물포해전은 전쟁이랄 것도 없는 일본의 야비한 공세였지만 러·일 간의 각축으로 전운이 감돌던 극동 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와 있던 유럽의 기자들에 의해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천이 전쟁터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천이 세기의 전쟁터로 인식된 것은 동족상잔의 전쟁 ‘6·25’ 때문이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에서 국군은 소련제 탱크 T34에 속수무책으로 밀렸으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세계의 전사(戰史)에 기록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은 1871년 미군이 인천 주둔 조선군에게 입힌 ‘피의 빚’을 79년이 지난 후 비로소 되갚았다는 상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 모진 전쟁들을 이겨내고서 맞은 21세기에 인천은 마침내 웅지를 펴기 시작하였다. 인천국제공항의 건설이 그 출발이었다. 1883년의 인천 개항이 해양 시대에 피동적으로 나라의 문을 연 것이었다면, 2001년의 인천국제공항 개항은 진정한 의미의 개항으로서 우주 항공의 시대에 우리 스스로 하늘을 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전쟁터로만 여겨졌던 인천으로서는 괄목상대할 만한 대변혁이요, 그 면면은 문자 그대로 유사 이래 처음 맞는 부흥기라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굿모닝 인천2009년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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