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역 철도 복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7-05 22:07:14
백운역 철도 복개
<넓고 넓은 소사벌을 갈라나가면/ 소사역과 부평역도 차례로 거쳐/ 산넘고 물건너 급히 달하니/ 속하다 주안역도 지내엿고나/ 원산을 우구려 가깝게 하고/ 근산에 뻗치여 멀게 하면서/ 우렁찬 기적을 울리는 철마/ 어언듯 제물포에 다다랏도다>
아마 경인철도 개통 당시 노래인 듯하다. ‘경인철도가’라고 하는데 부평평야를 거쳐 인천항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당시 소사라 불리던 부천역과 부평역 구간 넓은 벌판은 경인철도 연변의 풍광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넓던 평야도 철마산 줄기로 막히게 되자 부득이 끊어야 했다. 그것이 오늘의 백운역 절개지였다.
이 지점의 지형을 두고 ‘인천지방 향토사담’에서 이훈익옹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지점의 산맥은 수원의 광교산이 북으로 뻗어 안양의 수리산과 수암산을 이루고 계속해서 북으로 뻗어 소래산이 된다. 소래산 줄기는 주안산에 이르러 크게 틀면서 계양산맥을 형성하느라 大丁(대정)과 十丁(십정)이라 한 것을 한자의 오기로 大井(대정) 十井(십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大丁은 산맥이 크게 꺾이었다는 뜻이요 十丁은 산맥이 십자로 교차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은 소통의 벽이 되었다. 우선 조선조 권신 김안로가 착공한 경인운하를 중단케 했다. 부평평야로는 굴포천을 굴착하고 십정동 쪽에서도 땅을 파들어 갔으나 철마산맥이 가로 막았던 것이다. 이곳의 경인철도도 당시로서는 퍽 어려운 공사였으리라 여겨진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인천시 중구 전동의 구름다리를 끊을 때도 인명사고가 있었음을 보아 난공사였으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산허리를 잘라 놓음으로써 철길은 열렸어도 낭떠러지 절개지로 인해 산허리의 정기는 끊어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막힘으로써 지척의 생활권도 갈라 놓았다. 경인선 전철화가 되자 부득이 백운고가교를 가설해야 했고 백운역 역사는 철도 위를 가로질러 설치했다.
백운역에서 백운초교까지 철도 위 300m 구간을 복개 녹지공원을 조성하리라 한다. 이를테면 인공 터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녹지축이 복원되면 생태로도 되살아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