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6>인천의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송도(松島)’는 없다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23 21:12:00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강좌
인천의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조 우성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1. ‘송도(松島)’는 없다
21세기 인천의 운명 건 신도시가 ‘송도’라니
일제의 잔재 달고는 역사 왜곡 탓할 수 없어
섬 아닌 땅을 ‘섬’이라고 부르는 인천사람들
“어운(語韻)도 그리운손 인천 새 동명(洞名)”
“순수한 조선색(朝鮮色)의 76개 동(洞)”
“신년부터 완전히 왜취(倭臭)를 말살하자!”
1945년 12월 23일자 대중일보(大衆日報) 2면의 톱기사 제목이다. 이날 인천 최초의 국문신문인 대중일보는 일제가 인천 땅에 제멋대로 박아놓은 ‘언어의 쇠말뚝’(일본식 지명)을 인천시(仁川市) 당국이 마침내 뽑아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문은 “8.15해방 이후에도 아직 거리에는 가증스럽고 더러운 왜색이 일소되지 못하고 국치적(國恥的)인 정명(町名)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었다.”고 전제하고, 이에 따라 시 당국은 “정명개정위원회(町名改正委員會)를 조직해 수차 협의한 결과 ‘정(町)’을 ‘동(洞)’으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개칭해 46년 1월 1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인천시가 새로 정해 발표한 76개 동명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왜색이 짙은 대표적인 예를 몇몇 든다면 다음과 같다. 송도정(松島町)-옥련동(玉連洞), 도산정(桃山町)-도원동(桃源洞), 소화정(昭和町)-부평동(富平洞), 대정정(大正町)-계산동(桂山洞), 산수정(山手町)-송학동(松鶴洞), 궁정(宮町)-신생동(新生洞), 부도정(敷島町)-선화동(仙花洞), 산근정(山根町)-전동(錢洞), 명치정(明治町)-부개동(富開洞), 운양정(雲揚町)-백석동(白石洞), 이등정(伊藤町)-구산동(九山洞) 등.
이처럼 일제가 순일본식 지명(地名), 인명(人名), 연호명(年號名), 사건명(事件名), 시대명(時代名) 등을 인천 땅에 박아놓은 것은 순전히 제국주의적 야욕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1933년에 발행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서 그 같은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1907년 5월 13일 인천 일본영사관 소속 ‘노부오’ 이사관이 본국 총무장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면 그 사정을 익히 알 수 있다. “인천 시가(仁川市街)의 명칭은 종전대로의 통칭 혹은 땅문서상의 호명으로는(중략) 불편이 적지 않아 이번에 인천 시가 전부를 우리 마을 이름(일본식 지명을 말함-필자 주)을 붙이게 되었다.(중략)우리 마을 이름을 명하는 것은 다소 온당치 못한 점이 있지만,(중략)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일반의 호칭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로 미뤄 보면, 일제는 한일병합 이전인 1907년에 이미 이 땅에서 집요하게 식민화를 획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도 일본식 지명 박기 작업이 온당치 못함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인천을 일본화(日本化)하려 했던 저의에서 그 같은 만용을 저질렀던 것이다.
명명(命名)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 사정을 쉬 알 수 있다. 송도정(松島町)이 명백한 왜색 지명이라는 것은 재론삼론(再論三論)한 바 있어 언급하지 않겠거니와, 도산정(桃山町)은 일본인들이 조선 침략의 원흉인 풍신수길과 그의 시대를 기려 ‘도산시대(桃山時代)’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영 밥맛 떨어지는 지명이며, 거기에 일본의 왕호(王號)이자 연호(年號)인 명치정, 대정정, 소화정은 또 무엇이며, 운양호 사건을 연상케 하는 운양정, 일본인의 성(姓)을 딴 이등정에 이르면 가히 가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1946년 당시 인천시는 지역 사회의 식자(識者)들을 초치해 정명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왜식 정명’ 대신 ‘조선색(朝鮮色)과 어운(語韻 말의 가락)’을 살린 우리식 동명(洞名)을 새로 짓게 해 이를 공식적 법정동 명칭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오늘, 인천시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지난날의 바른 행정(行政)을 뒤집어 신도시의 이름을 ‘송도국제도시’, 그 지역의 동명을 ‘송도동’이라 하여 ‘송도(松島)’ 부활에 앞장서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신도시’를 ‘송도(松島)’라 부른 이유인즉, 과거부터 민간이 그 일대를 그렇게 불러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인데, 그 과거라는 것이 기껏 1937년이요, 그 명명자(命名者)가 일본인이며, 그 의도가 인천의 식민지화였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송도'를 관철시킨 것은 1946년 인천의 선대들이 ‘송도정’을 ‘옥련동’으로 바꾸었던 ‘왜취말소(倭臭抹消)’라는 취지와도 정면 배치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 화두인 ‘친일 청산’과도 빗가는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인천의 역사성, 정체성까지도 흠집 낼 수밖에 없는 착오인 것이다.
인천시는 이 문제에 관한한 괜한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니다. 일의 시비와 경중과 선후를 차분히 가리지 못하고 의욕만을 앞세워 (1)‘송도국제도시’가 이미 ‘브랜드’로서 세계에 알려졌다(그러나 신도시는 이제부터가 출발이란 게 일반적 인식이다) (2)복잡다단한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행자부 승인보다 더 큰 행정적 절차가 무엇일까) (3)개정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비용이 들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이는 비용 문제가 아니다) 등 여러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한다면 먼 훗날까지 두고두고 탈을 남기는 우를 범하게 될 게 번연한 것이다.
어쨌든 ‘신도시’는 여러분의 노고에 의해 화려한 문을 열 것이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삶과 꿈을 영위할 진정한 ‘신도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우리 고장 인천의 2세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자손손 21세기 초 ‘신도시’를 건설했던 선대 인천인들을 추억하며 우리 인천을 ‘동북아의 중심 도시’로 키워 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의 주역인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지 못해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되살려 유산으로 전해 주겠다는 것인가? 부디 ‘송도(松島)’란 지명이 일본인들조차 ‘우리 마을 이름’이라고 자인한 치욕적 역사의 유물임을 명지해 주기 바란다.
인천의 역(驛) 이름도 문제 있다
지난 주, 눈길이 가는 뉴스 하나가 있었다. 하도 들어 진저리가 나는 수도 이전이나 보안법 존폐 문제가 아니라, 경춘선에 ‘김유정 역(驛)’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김형직군(郡)’, ‘김책시(市)’ 같은 북한식 지명이나 우리 우표, 화폐에는 이따금 인물이 등장했었지만 역 이름에 ‘사람’이 오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1939년 개통이래 65년간 사용해 오던 역 이름(경춘선 신남역)을 오는 12월 1일을 기해 일거에 바꾸는 이유는 그 곳이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임을 알리고, 그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것이라 한다.
일단은 춘천시의 청을 받아들인 철도청을 칭찬해야겠다. 그러나 돈벌이만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 정신없이 뛰어온 철도청이었다. 소위 민자역(民資驛) 건설 붐이 그 하나다. 30년 전만 해도 전국 각처의 정거장 일대는 그 도시의 광장이었다. 분수대가 있고, 야외 벤치가 놓여 있는 만남의 장소요, ‘무슨무슨 궐기대회’를 여는 공공 집회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철도청은 돈벌이에 급급해 전국의 광장을 ‘민자’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동인천역의 경우, 수도국산까지 훤히 바라다 보이던 스카이라인을 가로막는 ‘민자역사’ 건립을 허가해 주었다. 그 결과 답답함은 물론이거니와, 정작 역의 입출구도 찾기도 어렵게 됐고, 이용하기도 꽤 불편해졌다. 정거장에 들어가면 에스컬레이터 따위를 안 타도 어렵지 않게 곧장 기차를 탈 수 있던 편안함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주객전도도 정말 유만부동이다. 겉만 보면 시설이 다양해진 것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그만큼 불편해진 것이다.
그런 판에 오래 전부터 역명과 지명이 생뚱한 인천 지역의 역 이름들을 고쳐 달라면 손사래를 치던 철도청이 아닌 밤중에 ‘김유정역’을 들고 나왔으니 인천사람들로서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의 요구는 역을 빌어 돈벌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 애초에 철도청의 잘못된 작명 때문에 지역적 정체성을 훼손 당하고 있으니 이를 시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외면해 왔으니, “전국 636개 역 대부분이 지명을 역명으로 쓰고 있다”는 철도청 관계자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다.
얼토당토않게 ‘제물포역’이 무언가? ‘제물포’는 원래 지금의 인천역 일대를 가리킨 포구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종종 타지역 분들이 ‘제물포역’에 내려서 바다를 찾아 헤매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벌였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철도 기공식을 거행한 곳이 현 ‘도원역’ 부근일진대, 경인선 개통 당시의 역이름인 ‘우각동역(牛角洞驛)’을 살려 이를 ‘한국 철도 발상지 역’으로 기념한다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것인가. 관광자원이 되고도 남을 아이템인 것이다. 그러나 철도청은 자신들의 역사인 철도사(鐵道史)조차 망각한 채 왜식 그늘(桃山町)이 배어 있는 ‘도원역’을 택했던 것이다.
철도청은 차제에 인천의 잘못된 역 이름도 스스로 바꿔주기를 바란다. ‘인천역’을 ‘제물포역’으로 고쳐 제자리를 찾아주고, 인천의 동쪽에 있지도 않은 ‘동인천역’은 그 옛날 싸리나무고개의 정취를 살려 ‘축현역’으로, ‘도원역’은 1906년 이전 이름 그대로 ‘우각동역’, 또는 우리 나라 최초로 고유어 역명인 ‘쇠뿔역’으로 고치는 게 마땅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철도의 발상지인 인천을 제쳐놓고 한국 ‘철도 시발지 비’를 엉뚱하게 노량진에 세우거나, 철도박물관마저 철도와 별 인연이 없는 경기도 의왕시에 세운 것 같은 우를 철도청이 계속 되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든 우리는 중요한 생활공간의 하나인 역 이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살아왔다. 결코 그까짓 역 이름 하나쯤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니 인천 길거리에 ‘풍신수길’을 떠올리게 하는 왜식 지명인 ‘도산(桃山)1길’이라는 표지판이 버젓이 내걸려 있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목소리를 하늘에 높이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를 역사로 배우고, 이를 제대로 새기지 않는다면 참으로 버거운 일들이 안팎으로 벌어질 것 같다.
2. 일제강점기 인천 지명 실상
일제 강점기의 인천 지명 실상
왕호와 육해군 원수 제독 이름
‘송도’는 지명이자, 군함의 명칭
최근 ‘신도시’의 이름과 그 법정동 명칭을 인천시 연수구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동’과 ‘송도국제도시’로 정한 바 있다. '송도'가 우리 고유의 지명이라는 관점에서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송도'는 명백한 일본식 정명(町名)의 부활인 것이다. 그 자초지종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구한말 인천도호부 시절, 현 연수구 일대는 인천부 원우이면(仁川府 遠又爾面)’으로 ‘송도’라는 지명은 애초부터 없었다. 한일병합 후인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인천부 영역은 '원우이면'을 배제한 지금의 중구 일대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인천부’ 지도에 연수구 일대는 부천군 문학면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1936년 9월 26일 그 일부를 다시 인천부에 편입시킨 조선총독부 관보(호외)에도 ‘옥련리, 동춘리, 문학리’등은 편입대상 지역으로 명시돼 있어도 ‘송도'는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옥련리’가 ‘송도정(松島町)’으로 바뀐 것은 1936년 이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일제는 얼토당토하지 않게 육지에 섬의 이름일 수밖에 없는 ‘송도(松島)’라는 ‘언어의 쇠말뚝’을 박아 놓은 것일까?
일본인들이 섬과 육지도 구별치 못했던 게 아니라면, 그 같은 명명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에 유의하면서 순 우리식 지명을 뺀 일본식 지명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소화정(昭和町-부평동), 대정정(大正町-계산동), 명치정(明治町-부개동), 이등정(伊藤町-구산동), 화방정(花房町-북성동), 정상정(井上町-연희동)-왕호(王號)나 국가 공신 급에 준하는 사람
(2) 대도정(大島町-십정동), 조생정(爪生町-검암동), 목월정(木越町-간석동), 천상정(川上町-청천동), 촌상정(村上町-서곶 고작리)-인천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청일ㆍ러일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원수 및 대장급 군인
(3)천간정(淺間町-가좌동), 낭속정(浪速町-서창동), 천대전정(千代田町-가정동), 삼립정(三笠町-삼산동), 미생정(彌生町-북성동), 송도정(松島町-옥련동)-청일ㆍ러일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운 전함
(4) 도산정(桃山町-도원동), 일향정(日向町-고잔동), 동운정(東雲町-서운동), 용강정(龍岡町-인현동), 송도정(松島町-옥련동)- 일본 전역에 흔히 쓰이고 있는 지명 등이다.
따라서‘송도’는 일본 전역에서 두루 쓰이고 있는 섬 이름인 동시에 ‘송도유원지’ 등을 만들면서 일본 최대 관광지의 하나인 미야기 현 ‘송도’의 명성을 차용해 오고자 붙인 지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지형(地形)을 전혀 감안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한 열쇠는 일본 해군이 자랑하는 소위 ‘삼경함(三景艦)’이 지니고 있었다. '삼경함’이란 무엇이고, 인천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조선총독부 발행‘보통학교 국어독본 제7권(1914년 발행)’을 보면, 소위 ‘일본 3경(三景)’이 소개되어 있다.
일본은 미야기 현의‘송도(松島), 교토의 교립(橋立), 히로시마의‘엄도(嚴島)’를‘3경’이라 했는데, 일본 해군이 그 이름을 딴 순양함 3척을 취항시켜 소위 ‘3경함(三景艦)’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인천항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송도호'는 1892년 프랑스에서 건조돼 청일전쟁 때는 연합 함대 기함으로서, 러일전쟁 때는 제3함대 제5전대로 참전한 바 있으며 1908년 4월 대만 마공(馬公) 지역에서 선내 폭약고 폭발로 침몰해 370명 중 207명이 사망했으며 현재 나가사키의 사세보 해군묘지에 이들의 ‘순난자의 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이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 청일ㆍ러일 두 전쟁에서 이겨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청나라를 쳤다는 것은 군국주의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그 전승을 기리기 위해 두 전쟁과 관련이 깊은 인천에 그를 상징하는 정명(町名)을 여러 군데 붙였는데 그 가운데의 하나가 '송도'였다.
따라서 문제의 '송도'는 일본의 지명이자, 전함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도시와 그 법정동 이름을 '송도'로 정하자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마저 그 부당성을 스스로 지적한 마당에 왜 우리가 오늘에 와서 이를 되살리려는 것인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신도시’의 역사는 지금부터다. 벌써부터‘세계적인 브랜드’운운하기 전에 고정관념에 빠져 그 이름에서 일제 잔재 하나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돌이켜 봐야 한다. 어쨌거나 ‘신도시’는 섬이 아니다. 애초부터 '송도(松島)'란 지명은 자격 상실이었다.
3. 송도함의 정체
‘송도(松島)’의 정체 군국주의 화신(化神)
청일ㆍ러일전쟁에 참전하여 승리 거두어
일본이 자랑하는 삼경함(三景艦)의 하나
인천항은 이른바 1875년 ‘운양호 사건’ 후 개항되었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청국,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군함들은 인천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특히 1894년 5월 13일에는 무려 28척의 각국 군함들이 인천항에 집결해 있었고, 그 해 7월 25일 마침내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일본은 세계 최대급인 30.5cm 포 4문을 단 청국 북양함대의 주력 진원호(鎭遠號)와 정원호(定遠號)의 위력에 놀라 32cm 주포(主砲) 1문, 12cm 포 12문, 47mm 포 6문을 창작한 ‘송도함(松島艦)’을 비롯해 엄도함(嚴島艦), 교립함(橋立艦) 등 소위 3경함(三景艦)을 서둘러 진수시켜 놓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송도함(松島艦)’은 황해해전(9월 17일) 때 기함(旗艦)으로 참전해 청국의 ‘진원호’ 앞부분을 명중시켜 마스트를 쓰러뜨렸으나, 좌현에 ‘진원호’의 포를 맞아 사망 34명, 중경상자 7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러일전쟁 때는 제3함대 제5전대(戰隊) 소속 순양함으로 참전하였다.
그때 이미 인천항을 모항처럼 오갔던 ‘송도함’을 비롯한 일본 군함들은 배 꽁무니에 으레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달고 다녔다. ‘욱일기’는 16개의 햇살을 방사형으로 그려 ‘아침 해가 하늘에 떠오르는 향상’을 나타내고 있지만, 군국주의 향수에 젖어 사는 일본 우파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욱일기’는 1870년 태정관(太政官) 고시에 따라 육군이 먼저 사용하였다. 해군은 1889년 군함기(軍艦旗)로 채택했다가 1945년 패전 후 폐지했다. ‘욱일기’가 재등장한 것은 1954년의 ‘자위대법(自衛隊法)에 따른 것으로 현재는 해군이 주로 사용하고, 육군은 해외 출병 이외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상징하는 ‘욱일기’를 단 일본 군함이 얼마 전 인천항에 출현했던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 몇 년부터 러일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가 연안부두에 ‘러일전쟁 추모비’를 세운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다만, 러일의 인천항 재등장이 100여 년 전에 벌인 ‘각축(角逐)’의 전초전이 아닐까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려해야 할 일은 우리의 몰역사적 태도일 것이다. ‘욱일기’를 달고 인천항을 드나들었던 ‘송도함(松島艦)’의 이름을 딴 일제 때의 정명(町名)을 신도시 이름으로 부활시킨 인천시를 생각하면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싶다.
도대체 인천 어디에 ‘송도(松島)’라는 섬이 있었단 말인가? 갯펄을 매립한 육지를 어찌하여 소나무가 우거진 섬 ‘송도’라고 부르고 있는가? 일제 강점기 당시 인천의 정명 대부분이 일본 군함의 명칭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송도정(松島町)’이었음을 왜 굳이 모른 척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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