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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자료]<5>인천근대건축산책

by 형과니 2023. 5. 31.

[자료]<5>인천근대건축산책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23 22:43:32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 강좌 강의자료]

 

인천근대건축산책

손 장원 (인천시 문화재위원, 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

 

1부 인천 근대건축의 전개과정

 

시기구분 : 개항기, 일제강점 초중기, 일제강점 말기

 

개항기는 서양인,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이 자국의 건축물을 인천에 세운 시기로 응봉산 남쪽 경사지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로 채워짐

 

일제강점이후에는 새로 건축되는 건물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건축양식도 일본식이나 일본 의양풍 건축물이 주류를 이룸

 

건물의 용도도 관공서나 상사 등의 건축은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주로 소규모 점포나 주택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인천우체국, 인천공회당,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신사옥) 등이 등장

 

1930년대에는 닛센(日鮮)빌딩과 같은 대형 업무빌딩이 건축됨

 

주거용 건축물도 과거의 소규모 점포주택에서 벗어나, 문화주택 중심의 주거전용 건물이 세워짐

 

일제강점말기인 1930년대 후반 이후의 건축경향은 산업용 대규모 건축물과 이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위한 소규모 영단주택으로 대표됨

 

인천지역 근대건축물의 유입경로

 

 

(1) 개항기(1883- 1910)

 

일본인 : 일본식 점포주택과 인천 최초의 양관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인천영사관을 세움

 

- 건축물 양식은 일본식, 일본 의양풍(일본식+서양식), 서양식

 

- 일본식이나 의양풍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었고 외벽은 목조 비늘판벽으로 마감

 

- 일본식 건축물의 대부분은 점포(1)와 주거 공간(2)으로 구성된 일본식 점포주택

 

- 의양풍 건축물로는 일본 인천영사관이 대표적임

 

- 구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구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구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대불호텔 등은 벽돌을 사용하여 건축

 

청나라 사람들 : 점포주택을 주로 세움

 

- 경사지에는 반 지하 건물이 세워져 특이한 경관을 연출

 

- 건축양식 : 중국식과 서양식이 섞인 형태

 

- 거의 대부분이 벽돌을 사용하여 세움

 

- 청국영사관(1884), 스튜어드호텔 등

 

유럽인 :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건축물을 인천에 세움

 

- 당시 유럽에는 이전부터 있었던 고전주의, 낭만주의 양식이 계속되고 있었고 장식을 배제한 새로운 건축양식이 모색되는 시기이기도 했음

 

- 홈링거양행 인천지점(1898), 각국지계 시공서(市公署, 1898), 제물포구락부(1901) 등은 외견상 고전적 형태의 건물

 

- 결과적으로 응봉산 남쪽의 항구일대에는 유럽식, 중국식, 일본식 건축물이 세워진 근대문물의 전시장이 되었고 거리에는 외국인들이 활보

 

- 응봉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알려진 만국공원이 조성됨

 

- 존스턴 별장, 세창양행 사택 : 공원시설이 아니라 공원이라는 공공 공간 안에 세워진 개인공간

 

 

(2) 일제강점 초중기(1911-1930)

 

 

인천지역에 설치되어있던 조계지는 일제강점 이후 191311월에 모든 조계지가 폐지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의 유입은 미미한 수준이

 

세계적으로는 국제주의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으나, 이를 수용할만한 여건이 아닌 상태로 인천에는 이전시기의 유럽식 건축물이 지속적으로 세워짐

 

공공 건축물 : 소방대 청사(1910), 인천세관(1911), 인천경찰서(1923)

 

학교건축물 : 인천항 사립박문학교, 신흥초등학교, 축현초등학교, 인천고등학교, 인천여자고등학교 등

 

상업건축물은 미두취인소(1910년경),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1920), 인천우체국(1922), 인천공회당(1923), 인천곡물협회(1925)

 

 

(3) 일제강점 말기(1931-1945)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에서 소비적인 모더니즘 문화가 성행했던 시기

 

인천지역의 건축물도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과거의 장식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건축물이 세워짐

 

대표적인 건축물은 1933년에 세워진 인천부청

 

인천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주택건축과 산업건축에서 나타남

 

- 주택건축 :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 문화주택의 등장

 

- 인천항 부근의 주택지가 신흥동, 숭의동까지 확대되었으며, 주택난도 심각한 시기였음

 

- 신흥동과 숭의동 일대에 일본인 주거단지가 조성되면서 개항장 일대는 주거기능이 점차 줄어들고 상업지역적 성격이 심화됨

 

- 인천부의 관할구역이 부평 및 서곶 일대까지 확대되면서 주택난으로 주택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부영주택(府營住宅), 영단주택 건설이 추진되었다.

 

산업건축의 특징은 공업지역의 확대와 대규모 공장의 건축임

 

- 종래에는 인천항의 공장지대이던 송현동, 화수동, 만석동을 중심으로 한 북부매립지의 공장지대가 인천지역의 중심적 공장지대였음

 

- 이 시기에는 학익동, 용현동 일대의 인천의 동부지역에도 공장이 세워짐

 

- 특히 육군조병창을 위시한 부평의 공업지역은 부천, 서울과 연결되어 경인공업단지가 됨

 

- 주요 건축물로 : 인천부청, 직업소개소(1932), 일선빌딩(1930년대 초), 일본제분 인천공장(요코카와 공무소 설계, 1935), 조선기계제작소(1937),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1937), 경성공작주식회사(1939), 동경지포전기공업회사(오오스미(大隅)건축사무소 설계)

 

- 공장들은 일제가 추진한 인천의 병참기지 정책에 따라 세워진 것임

 

3. 인천의 근대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들

 

1)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사바찐은 스위스계로 1860년 러시아에서 출생했다. 교육경력은 2급자격증을 수여하는 학교의 증명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러시아의 육군유년학교로 추정되며, 공병과를 졸업했을 것이다. 러시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후 사바찐은 상하이에 갔으며, 거기서 뮐렌도르프를 만나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바찐이 인천을 통해 입국한 것은 1883917일이며, 입국당시 그의 직명은 영조교사(營造敎士)였다. 가족과 함께 인천에 온 사바찐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왕궁의 도면을 작성하는 일과 벽돌 생산을 위한 벽돌제조 가마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은 뭴렌도르프를 통해 지시되었고 사바찐은 인천에 머물면서 이를 수행했다. 인천해관에서

 

 

그림1) 시바찐이 설계한 건축물 비교

 

근무를 시작한 후 18884월 해직할 때까지 인천에서 건축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그는 인천에서 인천해관청사(1883년 말), 세창양행 사택(1884) 등을 설계했다. 또한 1884년 말에는 인천 최초의 부두를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해관근무를 마치고 서울에서 활동을 재개한 이후에도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188872)를 작성했고, 각국조계지의 만국공원(1888),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18988) 등을 설계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사바찐이 다시 인천으로 오게 된 것은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을 설계한 계기다. 그는 189911월부터 동청해상기선회사 인천대리점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인천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당시 그는 세창양행 사택에 세를 들었다. 그는 인천에 거주하면서 인천과 서울의 건축관련 업무를 계속하여 1900년에는 제물포구락부(19016월 완공), 1902년에는 러시아 인천영사관을 설계했다. 러일전쟁 후 사바찐과 가족들은 인천에서 프랑스 함선에 몸을 싣고 고국으로 돌아감으로써 23년에 이르는 한국에서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쿠르트 로트케겔(Curt Rothkegel)

 

중국인들은 쿠르트 로트케겔을 라극격(羅克格)이라 불렀다. 그가 칭따오 독일총독부에 근무할 때 그의 직책은 건축국 소속 건축기사였다. 이 때문에 그동안 로트케겔이 독일출신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폴란드 슐레지엔(Schlesien) 사강(Sagan)출신이다. 그의 출생연도와 건축관련 수업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는 칭따오 독일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칭따오 강소로기독당(江蘇路基督堂), 상하이 독일인구락부 등을 설계했다.

그림2 ) 제임스 존스턴 별장과 유사한 중국 청도의 건물

 

칭따오의 강소로기독당은 당시의 독일총독부와 중국인 집단거주지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1910년에 완공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칭따오에 진주한 일본군은 독일인을 포로로 처리했다. 그는 일본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수용되었다가 풀려나 일본에서 취업했다. 로트케겔의 일본취업 후 1946년 사망까지의 29년간의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김태중은 뮐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사바찐이 세창양행을 설계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이는 최성연이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밝히고 있는 중국인 대목에 의해 지어졌다는 파울 슈르바옴의 증언과 상치된다.

 

3) 니이노미다카마사(新家孝正)

 

민간부문에서 근대건축교육을 받은 일본인 건축가의 한국진출은 1899년에 준공된 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을 설계한 니이노미타카마사가 시초로 추정된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한 건축가이다. 누마쯔 병학교(沼津兵學校)9기 졸업생으로 원래의 이름은 히코타로우(彦太郞). 병학교가 폐교된 후에는 나중에 동경제국대학으로 통합되는 고부(工部)대학에 입학하여 1882년에 건축과를 졸업했다. 당시의 고부대학은 대부분 영국 대학의 건축과를 졸업한 사람들이 최신의 건축기술을 직접 가르치던 학교였다졸업 후에는 궁내성(宮內省), 공부성(工部省), 황거어조영사무국(皇居御造營事務局), 체신성(遞信省)에서 일했다. 1887년부터 1893년까지는 일본토목회사의 기사로 일했으며, 이후 민간에서 활동했다. 1898년에는 일본근대건축의 비조로 알려진 타츠노킨코(辰野金吾)가 설계한 일본 제1은행 본점의 공사감독을 역임했고 그해에 일본 제1은행 나고야지점을 설계했다. 1914년에는 공학박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건축설계사무소를 경영하기도 했다. 또한 도쿄 신주쿠에 있는 코가쿠인(工學院)대학 건축학과의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설계한 주요 건축물은 화족여학교(華族女學校, 1889), 일본 파노라마관(1890), 무린암(無隣庵, 1898)과 무린암 양관(洋館, 1898) 등이 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무린암은 야마가타아리토모(山県有朋)의 별장이다. 1903년 이 별장에서는 야마가타아리토모, 이또히로부미 등이 모여 일본의 외교방침에 관한 회의(무린암회의 ; 無鄰庵 會議)를 한 곳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당시 일본에서는 최상의 건축교육을 받았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구축한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장소가 되었고, 일본국 황태자의 결혼기념건축물을 시공하기도 하였다.

 

2)표기방법은 ()Silesia ()Slezko ()lsk이며, 폴란드 남서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지방이다.

 

4. 인천의 근대건축물에 사용된 건축재료

 

개항기 중국인이나 유럽인이 세운 건물은 대부분 벽돌조였다. 이와 달리 일본인들은 목조점포주택인 마찌야나 나가야를 세웠다. 따라서 자국에서와 같이 건축물에 벽돌을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구 일본제18은행, 구 일본제58은행,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이나 대불호텔은 벽돌을 사용했고, 구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석조로 건축했다.

 

1) 나무

 

나무를 주된 건축구조재로 사용하던 일본은 관공서나 점포 등을 세우기 위해 나무를 사용해야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던 나무는 그들이 쓰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산 나무를 들여와 구조재로 사용했다. 구조재외에 건축용 판재와 수장재, 창호재 및 가구재 등은 1905년 즈음하여 수입되었다.

 

2) 벽돌

 

중국인이나 서양인들은 건축에 벽돌을 많이 사용했지만,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벽돌조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그러나 개항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량생산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사바찐에게 벽돌생산을 위한 벽돌제조가마를 만드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개항 초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벽돌을 수입하거나 제조공장을 만들어야 했다. 1889년 인천의 중국인 건축청부업자 지셩(吉盛)은 수입한 벽돌 성형기로 흑회색 벽돌제조를 시작했다. 개항 초기 벽돌을 제조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중국인이 만든 벽돌을 사용했다. 일본인의 벽돌생산은 중국인에 비해 상당히 늦었는데, 1906년에는 아끼다(秋田)상회가 적벽돌 제조를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후 야마노(山野)가 숭의동에 공장을 설치하여 인천지역 벽돌수요량의 대부분을 여기서 공급했으며, 19322월에는 인천요업주식회사를 매수하고 서울에 4개의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3) 지붕마감재료

 

기와는 우리나라의 전통건축물에도 흔히 사용되는 지붕마감 재료로 이를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기와는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기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인천에 진출한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와를 생산하거나 수입해야만 했다. 인천에서의 일본식 기와제조는 1888년에 호리(堀久太郞)가 시작했다. 다른 제조업자도 등장했지만 수입산의 증가로 문을 닫았다. 이후 1910년에는 인천의 건축경기 부진과 문화주택의 등장에 따른 일본식 검은색 기와의 사용감소로 인천에서의 기와제조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4) 유리

 

과거 우리나라에서 일반 건축물에 유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현존하는 전통주택의 대청마루에 설치된 유리문은 일본식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유리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된 서양에서는 건축물에 유리를 많이 사용했다. 이 때문에 개항이후 외국인들이 세운 건축물의 창문에는 많은 유리가 사용되었지만 전량 수입에 의존하였다. 당시 인천에 진출해있던 세창양행,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타운센드양행 등에서 수입한 유리가 창문용으로 사용되었다. 인천에서의 유리 제조는 1905년 이후의 일이다. 이 때 송월동에 설치된 구야(久野)유리제조소가 인천 최초의 유리제조소이다. 1928년에는 만석동에서 인천유리제조소가 개업했다. 한편, 19001월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인천에 유리공장을 세우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2부 인천근대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들

 

. 1900년대 초 인천의 사무건축/군회조점(郡廻漕店)

 

1. 코오리킨자부로(郡金三郞)

 

상량문에 기록된 코오리킨자부로(郡金三郞)는 무역 및 해운업자로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사람으로 인천 개항초기에 도항하여 무역 및 해운업에 종사했으며, 일본우선회사 기선취급점을 겸하기도 했다. 코오리는 당초 1877년 부산으로 건너와 무역과 수화물 도매를 위해 코오리 상점을 열었다. 상점이 번성하자 친동생인 이케다스케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그는 아직 개항하지 않은 인천으로 진출했다. 그는 1883년 울릉도 탐사선인 진세이마루(鎭西丸)으로 인천항해를 시도하여 인천항내에 출입한 선박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해운업을 시작하였고 갑신정변(1884) 때에는 그가 주도하여 부인 및 부상자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근거로 1904년에는 인천일본거류민회는 그에게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당시 인천에서 진출해있던 일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일본의 한국침략사업에 적극 협조했다. 청일전쟁이 당시 이운사 소속의 이운호가 인천에서 중국의 지푸(芝罘)와 텐진(天津)을 운항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불리하다고 느낀 일본은 조선정부에게 배의 운항을 정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당시 이운호의 착발을 책임지고 있던 세창양행에 압력을 가해 일본 해군과 육군의 수송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일본우선회사에게 이운호를 대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창양행은 교전 당사국인 일본군의 수송업무를 맡은 우선회사에게 배를 임대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계약의 해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방편으로 일본은 민간업자인 코오리에게 이운호의 임대를 요청하여 형식적으로는 그가 임대한 것으로 꾸미는데도 참여했다.

 

인천사정(1892년 발간, 주역본 p.47,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에 따르면 그는 인천항 해안 일본거류지에서 군회조점(郡廻漕店)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의 긴요문제(1903)에는 상호명은 군상점(郡商店)’, 업종은 해운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발간된 재한실업가명감(1904)에 기록된 그의 회사의 위치는 인천항 해안통이며, 상호는 郡商店이며, 업종은 여전히 무역업과 해운업이다. 이 당시 코오리는 인천미두취인소의 주식 51주를 가진 주주였으며, 1904년도의 기록에도 여전히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후 그가 인천미두취인소의 이사에서 물러났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의 기록에는 코오리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코오리가 소유했던 재산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조계지의 필지별 소유자와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토지조사부(1910~ 18년 사이에 작성)를 조사했다. 일본조계지의 필지별 소유자에는 코오리가 현재의 해안동 16-5번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기록에는 코오리의 동생인 이케다가 소유한 토지는 있으나, 그가 소유한 토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인천수산주식회사(190712월 설립)는 총 1,500주의 주식으로 출발했는데, 이케다는 50주를 소유한 주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기록은 없다. 또한 인천미두취인소와 관련된 1921년과 1923년의 기록에 이케다스케의 이름은 있지만, 코오리의 이름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904년 이후 1923년경에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코오리보다 우리나라에서 사업수완을 발휘했던 사람은 그의 권유에 의해 조선어를 배운 그의 동생이다. 그는 1915년에는 나가사키현(長崎縣)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군회조점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확보한 사진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축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자료를 토대로 볼 때 1층에는 창고를 배치하고, 업무공간은 2층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의 평면은 의 일부를 파낸 ㄱ자형으로 이 부분에 주출입구를 두었다. 개구부 상부는 아치나 인방을 건 페디먼트로 처리했다. 출입구에는 반원아치를 설치하고, 1층 창문상부에는 페디먼트를, 2층 창문상부에는 결원아치를 올려 입면상의 변화를 도모했다. 1950년대 중반에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에는 동아산업주식회사가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196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1층 주출입구 부분을 증축했으며, 1층 창고 부분의 출입구과 창문을 완전히 변형되어, 2층 부분만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1층 창고부분을 Everett 기선회사가 입주하면서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출입구와 창문을 넓힌 것으로 추정된다.

 

2. 군회조점의 건축적 특징

 

군회조점의 위치는 해안동12-2번지로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홈 내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로 190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축연대가 확인된 것은 인천아트플랫홈 조성을 위한 리 모델링공사 중에 그 건물 지붕 속에서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곧이어 상량문이 발견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1888)에 이어 인천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며, 두 건물 모두 붉은 벽돌로 벽체를 구성하고 트러스를 걸었으며,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를 올려 마감했다.

 

(현재는 시멘트기와)

 

아트플랫홈으로 리 모델링공사를 실시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주출입구 상부 2층 부분도 증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1층은 삼우인쇄소, 2층은 동방운수주식회사가 사용했다.

 

 

증축부 외벽과 개구부 주위를 흰색마감재로 처리했으며, 1층 출입구를 막고 창문을 달아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보수하여 자료조사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으나,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건축물임에 틀림없다. 역사성이 있는 건축물을 개보수할 때는 반드시 충분한 문헌조사와 실측조사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군회조점은 일반 건축물처럼 개보수가 실시되었다.

 

이 건물에는 크기 별로 세 가지 벽돌이 사용되었다. 최초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의 크기는 225(220)×110(105)×58(55)인데, 이는 인근에 위치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 사용된 것과 유사하다. 나머지 벽돌은 주출입구부분을 증축할 때 사용한 벽돌과 최근 리 모델링을 하면서 사용한 벽돌로 크기는 210×100×60로 구형벽돌이다. 일본 벽돌은 연와(煉瓦)’라하여 렝가로 읽으며, 점토벽돌을 가마에 넣고 소성하면 흙속에 있던 철분으로 벽돌색이 붉게 변하는데, ‘붉은색 연와라하여 아까렝가라 했다. 1890년이후 관공서 등의 공공건축물에 붉은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 벽돌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사용된 줄눈의 크기는 가로줄눈 7.6, 세로줄눈 9.1가 사용되었으나,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한다. 이 건물에 사용된 줄눈의 크기는 가로줄눈과 세로줄눈 모두 7이며, 줄눈의 형태는 보기 드문 둥근 줄눈으로 상당히 아름답다. 19세기 극동아시아에 세워진 벽돌건물의 경우 영국식 조적방식을 선호했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근대건축물에는 영국식 쌓기방식과 네덜란드식 쌓기방식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 건물의 벽체는 영국식 쌓기방식을 취했다.

 

1901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를 맡은 지기조(志岐組)’라는 건설회사가 철도공사용 벽돌을 자체생산하기 위해 영등포에 벽돌공장을 세웠으며, 다음 해인 1902년부터 여러 개의 벽돌공장이 세워졌으나, 주로 자급용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건물에 사용된 벽돌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인천에 살았던 나비부인의 딸/베넷상사(광창양행, Bennet & Co.)

 

베넷상사는 영국인 월터베넷(Walter George Bennet)이 인천에서 설립운영했던 상사로 그 시원은 광창양행(廣昌洋行)이다. 1902년에 설립된 광행양행은 당초 베넷이 일본인 에바라(頴原修一郞)와 합작하여 만든 일영무역회사였지만, 후에 그가 나머지 지분을 인수하여 베넷상사로 개칭하고 영업을 계속하였다. 설립당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30년대 초 베넷상사는 현재의 해안동 41번지(, 신포공영주차장)에 있었다. 베넷은 영국 인천영사관이 철수한 뒤에는 영국 인천영사관에서 거주하면서 영국 인천영사를 겸했던 사람이다. 그는 1897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글로버 하나와 결혼했다. 그의 부인인 글로버 하나는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글로버하우스가 태어난 사람으로 이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림 ) 베넷상사(, 신포공영주차장) 일대

(자료 : 1933에 발간된 인천부사에 있는 항공사진에서 발췌하여 정리함)

 

글로버 하나의 아버지인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186124세의 나이에 글로버상회(Glover & Co.)를 설립했다. 그는 이 회사를 통해 막부와 번에 선박과 무기를 팔아 많은 돈을 벌었으며, 1864년에는 이화양행(Jardin Matheson Co.)의 대리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일본에 판 배 중에는 그의 고향 에딘버러의 홀 럿셀 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조선침략에 투입되는 운요(雲揚)호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영국에 유학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글로버 덕에 영국으로 서구문물을 접하게 된 이토는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를 만나 그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일본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왕성하게 사업을 벌여 많은 재산을 축적한 그는 사업력이 떨어지자 그의 사업 대부분을 미쯔비시 회사에게 넘겨주고 그 회사의 고문이 되어 살았다. 말년에는 도쿄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살다가 19117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도쿄의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한편, 그의 부인인 나비부인은 189952세에 사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무기상인인 그는 18633월 나사사키의 언덕 위에 자신의 집을 지었는데, 이 집이 바로 오폐라 나비부인의 실제무대인 글로버 하우스이다. 이 집은 현재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일대는 글로버공원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어있다. 나비부인은 푸치니가 작곡한 23장의 오페라로 일본 기녀 나비 부인이 미국 해군 장교 핀커튼(Pinkerton)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비극적 이야기로 1904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 중에서 나비부인만큼 널리 알려진 오페라도 없다. 세계적인 명성에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나비부인이 공연된 것은 1999925일 서울예술의 전당 공연이 처음이다. 이후 여러 차례의 공연이 있었으며, 금년에는 ‘2007수원화성국제연극제의 해외초청작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핀커튼이 바로 글로버하우스에 살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글로버이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글로버는 1866년 당시 이혼녀이던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했다. 글로버 부인은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하며, 나비부인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푸치니는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러한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인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는 1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이다. 글로버 하나는 어머니인 나비부인이 50세였던 1897년 영국인 베넷과 글로버 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베넷과의 사이에 22녀를 두었다. 그녀가 인천에서 태어난 장남을 일본 나가사키의 소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자녀들은 일본에서 교육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인천에 시집와서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베넷상사의 사택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녀가 베넷과 함께 1915년부터 1935년까지는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 파라다이스 호텔 터)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193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그림8 )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있는 글로버 하나의 묘비

 

한편, 베넷이 언제, 어떻게 인천에 왔는지, 사망일자와 장소 등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있어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193411월에 발간된 삼천리 제6권 제11호에 실린 半島配置英米 等 7外交陣容에는 영국영사관 영사대판(領事代辨) Bennett. U. G.로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이름에 대해서도 자료가 보완되어야 한다. 1898년 당시 그가 홈링거 상사의 지배인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1901년에도 이 상사의 지배인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홈링거 상사(본점 일본 나가사키 유럽인 거류지 소재) 인천지점이 개설된 189610월경에 인천에 온 것으로 보인다.

 

. 동일방직의 건축물들

 

동구 만석동에 위치한 동일방직은 한 때 우리나라 방적업의 메카로, 여성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이 회사는 당초 오사카에 본사를 둔 동양방적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동양방적주식회사는 1892년에 설립된 미에(三重)방적과 오사카(大阪)방적이 모태이며, 191426일 두 회사를 합병하여 동양방적이 창설했다. 현재는 토요보(東洋紡, TOYOBO)’란 이름으로 오사카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동양방적이 우리나라에 공장을 세운 것은 인천이 처음이며, 1936년에는 서울에도 공장을 세웠으나, 구 한말이래 한반도의 중부, 남부지방은 동양방적의 주요 판로였다. 동양방적 인천공장신설 당시 인천부는 회사에게 상당한 특혜를 주었다. 19324월 중순 오사카에서 회사의 대표자와 인천의 마쓰시마(松島)부윤은 요시다(吉田)상업회의소 의장의 교섭으로 가계약을 체결했으며, 이 가계약은 얼마 뒤 인천부 의회에서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 계약으로 인천부는 만석동 매립지 가운데 25,000평을 평당 5원으로 동양방직에 제공하고, 대지 성토 및 구거공사를 부담했다. 또한 19328월까지 지반조성공사를 완료하여 동양방직에 양도하기로 하였고, 공업용수가 부족할 경우에는 수돗물도 공급하기로 하였다. 회사 측이 부담할 내용은 총공사비 300만원의 예산으로 같은 해 9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338월에 준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인천부는 후보지를 포함하여 평당 550십전의 가격으로 48,000평을 매수했다. 인천부는 땅값으로만 평당 50전의 손해를 보면서도 구거신설, 성토공사도 부담하는 등 총 85,000원을 지출해야만 했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공장건설로 지가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 잔여토지 23,000평을 매각하여 충당할 예정이었다. 193212월 공사에 착수한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19336월 건물공사를 마무리하고, 기계 설비공사를 시작하여 1933101일 방기 31,488추와 직기 1,292대로 조업을 개시했다. 공장건설이 마무리되면서 1,300여명의 공장근로자를 모집했고, 1934326일에는 오사카 본 공장에서 출발한 숙련여직공이 상인천역을 통해 도착하여 5월부터 조업에 투입되었다. (매일신보/1932516)

 

공장가동이 본격화된 1934년 이 공장에는 약 3,000명의 공원과 약 6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원은 전부 조선인이었고, 직원은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1934년 소설가 강경애는 장편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당시의 인천항과 만석동의 동양방직을 무대로 삼아 조선인의 고단한 삶을 그리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핍박받는 조선인 노동자의 모습은 당시 동양방적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의 실제 모습이기도 했다. 공장에서는 개업이후 노동쟁의가 빈발했으며, ‘동양방적 인천공장 적색그룹사건등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활동하던 좌익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해방 후에도 좌익에 의한 노동쟁의는 계속되었다. 동양방적에는 해방 후의 혼란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현대사의 질곡이 그대로 투영되기도 했다. 1948년에는 북한이 수풍댐 발전소에서 대한민국으로 오던 송전선을 무단으로 자르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산량의 22.8%밖에 생산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으로 망가진 건물과 방적기기는 19531월에야 복구되었다. 해방 후 상공부 직할 공장인 동양방적공사로 운영되다가 1955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당시 정부의 사정가는 25억원이었으며,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던 서정익(徐廷翼)은 단독으로 입찰하여 공장을 불하받았다. 동양방적은 이후 1966년에 동일방직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립당시의 동양방직 인천공장>

 

 

<동일방직 의무실 정면>

 

동일방직 안에는 공장, 체육관, 기숙사, 의무실, 정자 등의 건물이 있다. 이 가운데 건축연대가 불분명한 의무실이 눈길을 끈다. 2004년에 발간된 근대문화유산목록화보고서(인천편)에는 1934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동양방적 인천공장 건립당시 사진에는 이 건물이 위치한 곳에 사택이 들어서 있고, 이는 1947년에 촬영된 항측사진에서도 변함이 없다. 회사 건물대장에 등재된 취득시기는 1958년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볼 때 사택을 헐고 공장을 증설하는 시점에 이 건물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신입사원연수를 위한 교육실로 사용하다가 사원이 줄어 의무실로 전환하였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이다. 이 공장의 의무실은 병원수준의 시설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차윤근(車潤根, 1918~2008. 3)이 해방 후 원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82년 당시 하루 평균 80명을 진료했으며, 내부에는 약국도 있었다.

 

 

<현관과 연결된 복도>

 

동일방직 의무실 건물에는 전통양식, 전통양식을 모방한 양식, 일본식이 복합적으로 구사되어있다. 즉 우리나라 전통양식은 지붕선, 기와(암수기와, 막새, 망와 등), 창살문양 등에서 찾을 수 있고, 전통양식을 모방한 흔적은 보 단부를 익공식으로 처리한 장식과 자를 구현한 벽돌벽 장식 등에 구현되어 있다. 또한 기둥의 형태와 배치, 기둥과 보의 결구방식, 서까래, 주출입구 포치와 복도 등은 일본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벽체는 붉은 벽돌을 쌓은 하단부와 목조기둥을 노출시키면서 벽체를 회로 마감한 상단부로 구분된다. 벽돌은 3장을 한 단위로 길이쌓기와 옆세워 쌓기를 반복하여 장식효과를 높였다. 현관 캐노피를 지지하는 좌우벽체에는 채광 및 장식용으로 보이는 원형창을 달았다. 주출입구의 출입문은 전통주택의 방문을 연상하게 하는 미서기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관과 연결된 복도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내부는 직접 조사하지 못해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외벽에 통풍구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마루를 깔았던 것으로 보이며, 난방은 난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옛 사택자리에 세워진 창립10주년 기념관은 연면적은 289평 규모의 체육관으로 1965101일 착공하여 19661월에 완공되었다. 관람석 1,200석을 갖춘 당시 인천 유일의 실내체육관이었다. 또한 19743월에는 김희춘이 설계한 연면적 1,682평 규모의 기숙사가 세워졌으며, 197936일 부설여자중고등학교가 기숙사 일부를 교사로 사용하여 개교했다. 이 학교는 1981년 학급으로 늘어남에 따라 기숙사 B1(400) 전체를 교실로 개수하기도 했으나, 2001년에 폐쇄되었고 기숙사와 교사는 비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