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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자료]<7>인천의 기독교와 민주화운동

by 형과니 2023. 5. 31.

[자료]<7>인천의 기독교와 민주화운동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28 17:27:17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 강좌 강의자료]

 

인천의 기독교와 민주화운동

박종렬(함께걷는길벗회, 희망을 만드는 마을사람들)

 

 

1.인천 기독교의 성장 배경

 

한강이남--감리교

한강이북--장로교

조봉암 --진보 기독교운동?

6.25 전후 보수적 기독교 정착

 

 

2.도시산업선교 태동의 역사와 인천의 도시산업선교

 

2-1초기에는 도시산업전도로 시작됨

 

*예장

 

1.예장 총회가 처음으로 1957412일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 설치

 

19589월 총회에서 인준 받음

 

2.직접 노동을 경험하면서 노동현실에 대한 훈련을 쌓고 산업전도에 실무자로 조지송 목사가 영등포산업선교회를 1962년에 시작하므로 지속적인 활동이 전개되게 되어 오늘에 이름

 

 

*기감

 

3.1961년 기감 목사 윤창덕(동일방직), 조용구(한국기계공업)가 노동자 대상으로 예배와 상담활동을 전개함

 

4.19619월 이 두 목사의 초청으로 시카고에서 산업전도의 경험을 쌓은 오명걸(George E. Ogle) 목사가 인천에 옴(처음 내리감리교회 다님)

 

5.196110월 인천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됨

 

6.19623월 인천 동.서지방 지방회의 결의에 따라 정식적인 지방 선교사업 시작

 

**프랑스의 노동사제의 영향을 받아 산업전도을 하려는 감리교 목회자들은 노동을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1962-1967년 사이 이승훈-조문걸-조승혁(1962), 김치복(1963), 안연순(1964-1966), 조화순-유흥식(1966), 김호현-윤문자-김정국(1967) 등 여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공장 혹은 부두에서 노동을 체험함으로서 산업전도를 시작했다.

 

 

*기장

 

7.19635월 이국선 목사의 대성목재 직원의 취직--대성목재() 전택완 장로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이국선 목사의 소명의식에서 탄생됨--교양과 후생 잠당하며 공장 안에 산업전도실을 설치함 그 후 한구신학대학의 선교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산업전도 방법 모색을 위해 자료 수집, 한국산업사회 신앙실태 를 조사하는 한편 배창민(Walter Beecham) 목사를 기장 총회 전도부 산업전도 전임선교사로 일하게 하고 고재식, 이규상, 정태기, 김광집 등 젊은 교역자들을 훈련시켜 산업선교에 일하게 함

 

*성공회

 

8.1961년 김요한 주교(Bishop Daily)의 남다른 관심으로 황지탄광에서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천주교

 

9.1958년 서울대병원 간호원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한 카톨릭노동청년회(JOC)1963년부터 임금노동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함

 

 

2-2.초기 산업선교는 재래식 전도방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요 프로그램이 예배와 강좌였고 경영자나 관리자들로부터 거부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산업현장에 적응하고 순종적인 기독인으로 만드어 기업경영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예장의 경우는 사원을 위한 성서연구 모임이나 크리스찬 경영주들의 모임도 가능했다.

 

2-3.전교회적으로 산업선교의 물결이 번지기 시작(1965)

 

-19645월 범교파적으로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구성함(19661월 한국산업전도실무자협의회로 개칭, 1971년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로 개칭)

 

-이권찬 목사(예장전도부), 정하은박사(선교문제연구소), 조승혁-오명결 목사(기감), 김요한주교(성공회)--매월 1회 씩 모임을 갖고 산업선교의 문제와 정보 교환 및 선교실무자들 간의 교제를 계속함

 

-19666월부터 JOC 에서도 참여 신구교 산업전도 실무자를 포괄하는 모임이 됨

 

2-4.산업전도 실무자들의 각성과 사회구원의 문제에 관심 시작

 

-산업사회 속에서 크리스찬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1968년부터 산업전도대신--> ‘도시산업선교(UIM : Urban-Industrial Mission)' 사용

 

-‘하나님의 선교(Missio-Dei)'의 신학을 수용

 

1).예배나 전도지 배부는 노동자의 생활 속에 깊이 감동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2).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없이는 복음의 내용을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3).교회와 산업 사회 사이의 심한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현장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교회가 해결하는 과제로 삼아야 한다.

 

4).노동자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자기의식이 필요하다

 

2-5.구체적인 선교방법으로 미국의 알린스키(Saul D, Alinsky)의 주민조직 방법론과 남미의 성인교육 이론가 프레이리(Paul Freire)의 의식화교육론을 배우고 적용하기 시작함

 

--인천의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기감), 동인천 산업전도 센타(기강)

 

--영등포 도시산업선교연합회(예장)

 

--경수도시산업선교회(기감)

 

--동서울도시산업선교회(예장, 기감)

 

2-6.인천 산선의 실무자 훈련과 노동자 교육

 

감리교의 인천산선은 처음부터 노동목회를 목표로 삼았다 노동목회를 할 목사는 기본적으로 남자는 1년 여자는 6개월의 공장생활을 거쳐야 했다 초대총무 조승혁 목사는 대성제재소에 들어가 나무를 나르고 무거운 합판을 트럭과 유개차에 실었다.

 

2대총무 조화순 목사도 동일방직에서 소녀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멸시받고 천대받으면서 지옥같은 노동을 감당했다

 

흩어지는교회

 

조지 오글 목사는교회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디아스포라 흩어지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거야 예수께서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듯이 지금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거였어 그게 교회라는 거야

 

2대 총무 조화순 목사의 말이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19699월 조승혁목사가 월간˜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에서도 발견된다

 

교회는 건물 중심에서 벗어나 일하는 세계와 근로자를 교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천산선 실무자들은 지역주민과 노동자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1962년 한국 최초의 공부방인 민들레공부방을 만들었고 지역민의 경제적 자립과

 

자조를 위해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였으며 무료진료사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일련 의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것은무지한 노동자

 

을 강의실에 앉혀놓고 지식을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평적인 토론과 학습이었다 이를

 

위해 평신도 중에서 제강기계, 전기제품˜제조˜유리철도통신˜교통방직공장에

 

서 각각 1명씩 총 12˜이 선발되었다 이˜‘12사도는 주말마다 함께 숙식하면서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공장에 부당해고나 부당노동행위가 횡행하는데 왜 노조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에는 노조가 있었지만 노조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다

 

“‘카플링 동력을 전달하는 기계장치 모임이라고 했어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에요

 

6개월 동안 교수 학자 신학자들을 초청해서 각각의 공장 사례도 발표하고 밤새토론하며 공부를 해 6개월 과정을 끝내면 감리교 감독이 와서 안수를 하고 각자의 공장에 파송을 했어 똑같은 ˜장이라도 돈벌러 다니던 6개월 전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른 거야 이 12사도

 

들이 뭘 했는지 알아 공장 노조를 바꾸거나 스스로 지부장이 된 거야”(조화순

 

12사도가 노조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조를 위한 노동교육프로그램의 필

 

요성이 대두됐다 인천산선은 금속방직 군속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철도 및

 

운송˜전기항만 자동차 관련노조와 함께 정기 노동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이 프로그램의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강대˜고려대 같은 대학들도 노동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지 오글과 두조목사의 참여를 요청했다

 

노동자 교육은 여기 따라올 데가 없었어 공장 경영을 분석할 정도로 전문적으로 했으니까 인천에 안오면 노동운동하는 축에 끼지 못할 정도로 여기가 노동운동의 중심지였어 동일방직 사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았다고 김근태 최영희 뭐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잖아 하여간 인천노동자들이 제일 셌어요”(조화순)

 

2-7.1968년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설치

 

도시빈민선교 실무자 훈련과 빈민선교 집중적 전개시작

 

3.1970년대의 인천의 민주화 운동에서 인천의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인천산선)의 역할

 

*19704월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

 

*19701113일 노동자 전태일 분신 사건

 

3-1.도시산업선교운동에 참여

 

---197114일 한국산업문제협의회 구성하고 참여

 

---1971928일 크리스찬사회행동협의체(KCAO-UIM)

 

카톨릭 4개 단체와 개신교 7개 단체의 연합(한국도시산업선교위원회(인천산선),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크리스찬아카데미, KSCF, 대한YMCA 연맹, 대한YWCA 연합회, 영등포산선)/197336일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명칭 변경/197528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1976925일 실무자 중심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로 개칭

 

3-2.한국베아링 황영환 해고 사건(19711213)

 

1)종업원 6000명 고용하는 회사, 2교대 12시간 근무 24시간 가동되는 공장,

 

2).작업조장인 황영환 해고 복직투쟁

 

야간작업 중 졸면 발길질 당하고 손등을 송곳으로 질리우는 비인간적 대우 받음에 수시로 항의, 19711213일 본인이 피곤하여 졸다가 야간감독 최광식에게 발각되어 시말서 제출-->총무과장을 통해 권고사직 요구-->노동조합 지부장 강준석에게 호소햇으나 비협조적(황영환은 올 10월에 모범종업원으로 표창까지 받았음)-->강준석 지부장에 해고 강력히 주장함-->이는 황영환이 조합의 감사로서 강준석의 부정을 지적했기 때문 -->19711230일 노동청 인천 근로감독관에게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고발함--근로감독관 시정 요구-->노조 지부장 강준석 조합원 황태석이란 사람에게 강요하여 황영환이 반조직행위를 했다는 각서를 쓰게 하여 이를 근거로 197235일 대의원대회에서 황영환을 제명, 조합원 자격 상실로 유니온숍 제도로 복직할 수 없게 함-->197238일 노조지부장 강준석의 부정사실을 서울지검 인천지청에 고발함-->39일 강준석 역으로 황영환을 명예훼손 및 무고죄로 맞고소함-->313일 연행되어 검사의 영장 발부받아 구속시킴-->조합원 40 여명이 1.임시총회 요구 2.황영환 복직, 3.노조지부장 부정사실 고발 등을 내용으로 서명운동하여 조합원 450명 중 3분의 2가 넘는 326명의 서명을 받음, 조합원 308명의 이름으로 노조지부장을 부평경찰서에 재고발하는 한편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발송함-->황영환 풀러낫으나 429일 전국금속노조 위원장 김병용이 노조 지부장 의 요청으로 돌연 중앙위원회를 열어 황영환을 본조에서 제명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의혹과 불만을 고조시킴-->중앙정보부 경기도분실에서 이상휘, 김종배, 조인호, 이상옥, 이종희 등 5인과 황영환을 연행, 이틀간 걸쳐 간첩임을 자수하라고 고문을 가하는가 하면 회유를 하는 등으로 협박을 가한 후 석방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함--

 

3).7년간의 법정투쟁

 

1972821일 서울민사지법에 해고무효소송을 제기-->1115일 패소-->항소 제기 1973627일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회사측 상고 대법원에서 7년에 걸친 법정투쟁 시작 19731010일 고등법원으로-->1974628일 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1977326일 다시 고등법원으로 환송-->회사측 다시 상고--> 1978318일 대법원 판결 확정 사건 종료

 

3-3.1972510일 동일방직 노동조합 결성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자리한 동일방직은 1934년 조업을 개시한 일본 도오요(동양)방적 인천 공장을 모태로 1955년 민영화되어 60년대 후반 값싼 여성 노동력을 바탕으로 수출 무대에서 선두를 다투기도 했다.

 

동일방직은 1972510일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남자 후보들을 물리치고 전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주길자)이 탄생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좁다란 길목에 들어선다.

 

당시 전체 조합원 1383명중 1214명이 여성들이었지만 지부장은 남자가 독점해온 것이 관례였다. 여성 지부장 당선 후 노동조합은 본격적인 탄압이 들어오기 전인 19764월까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변모해갔다.

 

*조화순 목사의 산업선교

 

196610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직장 여성부 실무자로 동일방직에 위장취업을 했다.

 

개인심령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믿었던 여목사였다. 6개월 간 노동 후 목사라는 나의 신분을 안 노동자들이 나를 멀리함--거리감/노동 마친 후 소그룹활동 시작--동료의식을 가진 15명 정도가 모임--진행방법과 내용도 처음에는 예배를 보고 교회적인 형식을 취하였더니 그 다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자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오락, 음악, 일반교양, 이성관계 등을 중점으로 두었다. -->인간의 권리, 인간의 본래의 모습, 평등, 자유, 진리, 평화 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뜸--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됨-->근로기준법, 노동조합에 관한 교육을 자청-->동일방직 전 여성근로자들이 인천산선 노동학교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기적--올바른 노조 대의원 선출 대의원 41명 중 29명 여성으로 바뀜-->1972년 여성지부장 선출되어 여성집행부를 구성함

 

1973년 여성지도부 훈련 시작--부평지역 각 공장 1명씩 선정하여 1개월 2-3, 1회는 12일 코스로 강의와 토론, 주어진 과제에 대한 활동보고와 결과에 대한 토론,반성, 등으로 진행됨(의식화훈련)

 

1975년에도 여성이 선출(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1976년에도 대의원선거 여성지부 지킴-->19782월 동일방직노조의 똥물사건 발생--대의원 선거날 새벽 회사측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이 걸레에 똥을 묻혀 투표하려 온 여성노동자들의 입과 귀와 코에 쑤셔박은 것이다. /어용노옫귀족 섬유노조위원장 김영태는 각본대로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 집행부 해산시킴--동일방직 여성노조원들의 거리로 투쟁이 시작됨--9.22 목요기도회 폭력사태 발생 43명이 끌려가 조화순, 이총각 노조지부장 권운상 등 4명은 치안본부로 글려가 2주만에 풀려남--116일 부산 기도회에서 발언한 것으로 117일 구속됨 4년 선고받음

 

3-4.1972년 조승혁 목사 연행 구타 사건

 

1972728일 인천 산업선교의 총무인 조승혁 목사가 중앙정보부 인천 지부에 연행되어 남산 정보부로 글려가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

 

동기 : “보라,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포스터--제목 아래 손가락이 절단된 손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를 제작하여 각 공장에 보내어 이를 부착하게 한 일이 잇는 데 그 경위를 알고자 연행했다는 이유를 댐

 

그런 그 포스터는 근로자들이 작업 중 안전을 기해서 불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안전계몽 포스터였다.

 

실제 조사 내용--동일방직,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주식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생겻을 때 왜 노조를 도왔으며, 한국베아링주식회사의 노동자 5명이 중앙정보부 인천분실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전파하며 중앙정보부를 비난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요지였다.

 

*조승혁 목사에 대한 탄압인 동시에 산업선교에 대한 당국의 본격적인 간섭과 방해 및 탄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

 

3-5.1974년 인천산선의 제2대 총무(72-83) 조화순 목사 구속(3개월) 기소유예로 석방

 

야외예배 때 설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였는데 이 때 노조 탄압에 대한 내용의 말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조사을 받음, 그 때 참여한 노동자 40명도 조사를 받음. 5월에 구속되어 3개월 되어 석방됨, 각 나라에서 항의 엽서 2장 씩 청와대와 나에게 보냈다고 한다.

 

3-6.노동자 유동우의 해고(인천 삼원섬유공업주식회사 노사분규)

 

유동우(55)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는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삼원섬유노조는 100% 외국인 투자기업에 결성돼 정상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노동조합이었어. 유신 초기의 정말 어려운 때였지. 7312월에 노조를 설립한 뒤부터 해산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수출공단 본부부터 시작해 노동청·경찰·중앙정보부에 보안사까지 엄청나게 불려다니고 조사받고. 결국 한국노총 섬유노조가 나를 지켜주지 못했지. 섬유노조 지부 사무실에서 나를 제명하는 회의가 끝난 지 한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회사에서 해고되고. 그 이듬해 8월에 해고된 뒤 복직 싸움도 참 열심히 했어.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김세균 선생이 수기를 한번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그 얘기를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던 거야.”

 

3-7. 인천 대성목재 이국선 목사 해임사건

 

3-8.조지 오글 목사 강제 추방 사건(19741214)

 

1954-19573년 동안 감리교 선교사로 --중고등학교 학생 영어선생이면서 한국 공부에 주력, 노동자들과 만나 공장을 방문하며 그들과 예배하곤 하였다.

 

1960-1965년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산업전도 시작--산업전도위원회 조직

 

1965년 귀국--위스콘신 대학에서 노사관계 공부 1966년 석사학위 받음

 

1966년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목회자들의 공장체험 프로그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사도프로그램, 공장목회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교육, 상담활동을 전개하여 산업선교로 발전하는 데 공헌함

 

1971년 귀국--197312경제발전에 있어서의 노동조합의 역할: 한국의 경우로 박사학위 받음

 

19739--서울대학에서 강의

 

19741214일 한국정부로부터 퇴거명령 받고 강제 추방당함--출입국관리법 위반이란 사유로/1010일 목요기도회에서 행한 오글 목사의 설교--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으로 그 다음날 연행함--각서 요구

 

3-9.시노트 신부 강제 추방사건(1975430)

 

미국 뉴욕 출신 1960년 메리놀 신학교 졸업 후 1961년 한국에 파견 인천답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한국선교 시작--1965년 영종도 본당 초대 주임신부--1974년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 회장을 맡음--1975414일 연장신청 제출--425일 법무부는 이를 불허하고 430일까지 출국을 통보함(197548일 인혁당 사형 후 장례식 사진 찍어 보도한 것)

 

3-10.조화순 목사 구속사건(1978117-)

 

1978116일 부산 감옥에 갇힌 동일방직 여성근로자들을 위해 인천산선 총무로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있다고 하여 참석하였을 뿐이었으나 강론을 하기로 한 분들이 안 나타나 동일방직근로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수난의 상황을 말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재판상황, 922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있었던 동일방직 기도회와 당시 경찰의 만행, 근로자들에 대한 잔인한 고문 등을 본대로 이야기했다.

 

그 다음날 5명의 경찰관에 의해 연행되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1115)시킴. 징역 5년 선고

 

4.1980년대의 인천 기독교 운동

 

4-1.인천산선-1기총무 조승혁(72)

 

2기 조화순(73-80) 3기 김동완 목사81-82 4기 조화순(82-83)

 

*김근태 씨가 김동완 목사와 함께 인천에 와서 노동상담 활동함

 

5기 김정택 목사84-86

 

6기 박일성 목사86-92

 

7기 남규우

 

8기 김창국 --이 때부터 지역복지센타로 이름을 바꿈(교단 소속)

 

9기 총무 김도진

 

4-2.기독노동자 운동(한국기독노동자인천지역연맹 활동)

 

86년 여름 기독노동자 하계수련회 개최

 

1987125고 박종철군 추모예배 및 살인 고문 정권 규탄 대회일꾼교회에서

 

1987315일 제2동인교회에서 87노동절 인천지역기면대회 개최 800여명 참석

 

198753() 샘터교회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 기념 노동자잔치 개최 400

 

1987625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인천기청, 한국노동자인천연맹 주최)

 

1987626일 오후 6시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인천시민평화대행진 부평역광장에서

 

민주헌법쟁취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로 열림

 

1987628일 오후 3시 여성노동문화 큰잔치 청암감리교회에서 500여명 참석

 

87년 여름 매포 수양관에서 기독노동자하계수련회 개최--민중교회 노동자들 결합

 

4명의 노동자 물에 빠져 사망함으로 장례식으로 이어짐

 

876월 민주화운동 국민대투쟁 이후, 인천기독노동자연맹을 중심으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인천민중교회연합(백마, 해인, 새봄, 사랑방, 산마루, 한뜻, 인항, 샘터, 한길, 소성교회 등)과 지역의 노동운동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인천지역 노동자대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더디어 198781()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2회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가 예장 소속 매포 수양관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개최되었었습니다.

 

노동자대회는 무더위 때문에 몸을 식히기 위해 매포수양관 주변 강변에서 물놀이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모래채취로 웅덩이가 파져 있는 것을 모르고 회원들이 수영하다 몸에 몇 동지가 빠지고 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동지들이 뛰어들다가 다시 빠지면서, 결국 인간띠를 연결하여 동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고 김현욱,박용선,유인식,이대용 노동형제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4-3.기독청년운동

 

인천기독청년협의회--감리교 청년회, 예장 청년회, 기장 청년회

 

만석감리, 가좌감리,

 

1987222일 창영감리교회에서 인천기독청년협의회 제10차 정기총회 개최 김영철 회장 선출(현 예장 새민족 교회 담임)

 

1987319일 기장 청년연합회 송림사랑방 교회에서 모임--한국EYC 총무 황인하 참석

 

1987523일 감리교 인천 동지방 청년연합회 주안지방 청년연합회,

 

요한웨슬레회심예배 율석감리교회에서 드림

 

1987531일 인천기청협 사무실 개원 예배

 

1987615일 김영철 회장 연행 구속(629일 석방)

 

1987625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인천기청, 한국노동자인천연맹 주최)

 

4-4.민중교회운동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82년도 새봄교회, 소성,

 

85년도 설립 사랑방 예림,

 

86년도 설립 한뜻, 해인,

 

새벽, 송현샘, 나섬, 새누리,

 

기감--일꾼교회, 백마교회, 산마루, 인항교회(김달성) 한길(맹완재)

 

예장--고백교회, 베다니 교회

 

노동자문화운동---노동조합 결성 교육,

 

민주화운동--1986: 권인숙성고문사건 폭로, 노동자인권운동, 5.3민주항쟁 참여

 

1987: 4.13호헌 조치 발표이후

 

198754일 인천지역 인권선교위원회 소속 금식 목회자 일동 성명 발표 후 금식 돌입, 인천제일감리교회에서(이규학 감독) 20명으로 시작-->5732명으로 증가(황규록, 이규학, 박동일, 이명화, 주복균, 권용각, 홍순욱, 이원배, 박은국, 이상수, 이충기, 회성봉, 권영국, 박상철 참여)

 

198758일 인천제일감리교회에서 오후 730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 개최 목회자 185명 참여

 

1987610일 박종철군 고문살해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인천지역시민대회 참여--610일을 군부독재 타도의 날로 정하고 6시 애국가를 부르며 대회 시작한다.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교회와 사찰은 타종을 한다. 10일 오후 9시부터 10분 간격으로 소등하고 tv 시청을 거부한다. 1000여명 시위 시작(신철호 목사 십자가가 들고)

 

1987614일 기장 인천시찰 오후 3시 제2동인교회 박동일 목사 설교

 

지역주민운동--주부교실, 탁아소, 공부방,

 

4-5. 인권운동, 목정평운동-->민주화운동국민본부 참여

 

1986년 제2차 정기총회(창녕감리교회) : 인천지역 인권선교 위원회(감리 : 황규록 목사, 이만규목사(청신제일교회 예장), 총무 이은규목사(가장), 서기 : 김달성 목사, 회계 : 이진 목사)--인천인권소식 발간(편집 박종렬)

 

198612월 인권주간 모금 참여 교회--창영감리, 신성감리, 기장동인, 기장제2동인, 평강감리, 서부감리, 만석감리, 전동감리, 아세아교회, 임마누엘 선교회 동참

 

1987224일 제3차 정기총회 창영감리교회 개최 --서광선 교수 강의

 

198747일 제4차 목회자 세미나--‘개헌과 민주주의

 

인권위 조직상황--지도위원--이춘직감독, 전주석 양정신 목사(기장),

 

실행위원(감리)--황규록, 안병원, 김달성, 박은국, 이충기, 서만권,

 

권영국, 이규학, 최세웅, 홍순욱, 최성봉, 이원배,

 

권혁찬, 이정일, 권용각, 주복균, 이상수, 임석구

 

(예장)--주인정(인천제일), 김베드로,

 

(기장)--정학진, 윤정소, 조영철, 이은규, 박동일, 박종렬, 이진,

 

(성공회)--정연우(내동), (구세군)--김운호(인천영문)

 

1987422일 일꾼 교회에 가해진 경찰 압수수색 행위에 대한 항의 문서 전달

 

(인천기독청년협, 기독노동자연맹 사무실도 압수수색)

 

198752일 인권위 실행위원 임원 연석회의 소집--직선제 민주헌법 실현을 위한 서명운동 전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식 주간 선포 결의

 

*감리교 민주화운동에 참여

 

198728일 감리교 인천 주안지방회(유세열 감리사) 주일 전교인 추모예배 후 동암역에 모여 연합추모예배 드리기로 함, 선린감리교회는 교회 마당에서 600여명의 교인이 추도식을 가짐

 

인천 북지방(주봉택 목사) 갈월교회에서 고문추방을 위한 기도회 개최(이원배 목사 사회, 이정일 목사 기도 최세웅 목사 설교, 서기택 목사 성명서)

 

1987210일 감리교 인천동지방은 창영교회에서 고문추방 특별기도시간 가짐

 

5.1990년 이후 기독교운동

 

*198731일 기장 경인노회 인천시찰회 ‘3.1절 기념 및 고문 추방을 위한 연합예배인천교회에서 드림

 

지역선교--송림동 나눔의집 , 일꾼 교회 신협, 공부방,

 

내일을 여는 집--해인교회, 사랑방교회

 

지역복지운동/평화통일운동

 

6.2000년 이후 기독교운동

 

지역복지운동--인천복지센타, 자활후견기관 위탁,

 

환경생태운동

 

평화통일운동-- 인천 6.15위원회 참여

 

종교인협의회

 

생명평화기독연대--한강하구평화의배 띄우기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