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대한 서양인의 기록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06 20:46:20
인천에 대한 서양인의 기록
강 옥 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세기 서구인들은 경제적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동양인의 생활이나 관습 등에 관심이 많아 여행을 통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하멜Hamel 표류기」(1668) 이후, 달레Dallet의 「한국교회사」(1874)와 오페르트Oppert의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1880) 등에 표출되었고, 이러한 책들은 여행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분석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선구적 이해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20세기 초에는 더 많은 저술이 나올 수 있었는데, 당시 대표적인 것이 헐버트Hulbert나 게일Gale의 연구서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연구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었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을 보는 입장이 서로 상치되어 엇갈린 견해를 노정시킨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리피스Griffis는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82)을 출간하였는데 그는 한국에 온 일이 없는 학자이자 선교사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들은 견문과 당시의 일본 및 서양인의 저술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한국독립과 복리를 위한 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헐버트나 맥켄지McKenzie와 달리 한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보지 않고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20여 년간 한국에 거주했고, 1905년과 1907년 고종의 밀사로도 활동한 바 있는 헐버트는 한국민족과 문화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한국의 발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기록된 인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해서 그런 기록이 남게 되었을까. 서해 5도는 어장으로서의 중요성도 크지만 옹진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로서도 일찍부터 서구열강의 주목을 받아 왔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특히 서해 5도와 옹진반도 일대를 중시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해군장교 홀Basil Hall은 『조선서해탐사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에 서해 5도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주 중국 대사인 맥스웰Murry Maxwell대령과 홀의 주요 임무는 백령도 해안과 동경 124˚ 46′, 북위 37˚ 50′일대의 섬들에 대한 측량이었다. 그들은 섬들을 ‘써 제임스 홀 군도’Sir James Hall's Group 라고 해도에 명명했다. 그들이 작성한 해도에 따라 서해 5도는 홀 군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홀 일행이 1816년 9월 1일 아침 9시, 백령도의 한 만(灣)에 정박한 뒤 섬에 상륙해서 본 것은 ‘갈대에 진흙을 발라 대강 엮은 듯한 40채의 집들과, 얼굴이 구리 빛으로 탄 험상궂고 약간 야만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영국인의 눈에 보인 백령도 주민들의 첫인상이었다. 중국을 거쳐 온 홀은 특히 전족(纏足)이 궁금했던지 이곳 여인들의 발이 ‘중국에서처럼 죄이지 않은 보통 크기였다’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홀은 그 후 10일간의 여정으로 서해의 몇몇 해안 지역과 제주도 등지를 탐사한 뒤 약간의 한국어 어휘를 채집하고 귀환했다.
이후에 인천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외국인들로는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 미국총영사 겸 공사관 서기관 샤이레 롱(Chaille-Long, 1842~1917), 프랑스의 여행가이자 지리․민속학자인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 1888),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1890), 영국의 작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1931~1904) 등이 있다.
인천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상은 대개 개항장 제물포의 고즈넉한 풍광을 소개하거나 각 조계지의 건물과 활기찬 거리나 사람들의 모습을 서술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최초로 발간된 잡지인『Korean Repository』(1892.1~1898.12),『Korea Review』(1901.1~1906.12) 에는 근대 건축물이 즐비한 일본, 청국, 외국인조계지의 이국적인 풍광이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고 있고, 제물포클럽 개회식 모습, 그밖에 강화江華에 대한 인상과 인천항에서의 역사적 사건(제물포해전 등)이 기술되어 있다.
오늘날 인천을 홍보하고 관광 상품화하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한다면, 이미 100여년 전 이방인들의 관심 속에 알려졌던 ‘제물포’를 기억 속에만 묻어두지 말고 재탐구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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