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혹한 도시 숲에서 먼 바다를 그리다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06 12:46:48
맹혹한 도시 숲에서 먼 바다를 그리다
이 종 복 시인, 향토사연구가
사각 빤쓰를 입고 한 쪽 팔꿈치를 무릎에 기댄 채 반가부좌 자세로 아랫도리를 향해 부채질을 하는 늙다리 선배를 보며, 나도 이 담에 꼭 저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20여 년 간을 한복바지만 입고 다닌 필자로서는 여간 시원해 보이는 게 아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과 맞물려 일찍 찾아든 무더위 표 수레바퀴에 참기름 같은 진땀이 짜내려지고 하루에도 두 차례 이상 윗도리를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다보면, 주책으로 보였던 선배의 정체감은 늙다리 시인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치 보리수 아래서 누렇게 시든 종려나무 가지를 주워 천천히 더위를 밀어내는 열대의 수행자처럼 말이다. 여하간 산발적인 무더위 잔매를 버텨낼 이웃들의 맷집이 은근히 염려되는 가운데, 역대 최대의 기상이변이 예상된다는 이번 여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두 손 모아 깍지를 끼고 말머리를 쳐들어본다.
우리나라 최초로 기상관측업무를 정식으로 담당했던 곳이 인천이라는 것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1904년을 기점으로 삼은 것인데, 역사적으로 을사늑약 한 해 전의 일이지만 이미 인천은 일본 제국주의 조선 침탈의 심장부 구실을 했던 관계로 일본의 권세가 극성을 부렸던 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의 요구에 따라 기상대가 인천에 세워진 것임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맺으려 한다.
본말은 여름 날씨에 빗대어 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너스레를 떨려고 했었으나 ‘아는 게 많은 죄’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에 기상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핵심을 짚어내지 못하고 거친 나무 등걸만 켜고 있음을 우선 사과드린다.
공원이란 이름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돼 기록된 것은 1888년의 일이다. 애꿎게도 공원이란 단어가 일본인이 만든 단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서양말 가든(Garden),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의 일본식 한자말이 공원(公園)인 것이다. 서구에서도 공원이란 단어가 상용화된 것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봉건중세사회의 붕괴와 근대시민사회의 계몽기를 거치면서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의 결과에 따른 시민의 지위 상승이 서구의 삶의 변화를 가져와 사회 공 개념으로 바뀌는 사건들이 속출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 개념의 탄생인 것이다. 봉건 영주와 절대 군주들에게 제한돼 있던 정원이 담장을 허물고 시민사회의 품으로 안기게 되는 사건을 통해 근대사회로 전환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덧붙여 우스운 예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통용하는 유치원(幼稚園)의 경우 서양말 킨더 가든(Kinder Garden) 혹은 킨더 가르텐(Kinder Garten)의 일본식 한자말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두 번 들어도 웃긴 말이기 때문이다.
영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인천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을 간직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개항 당시 인천에서 장사와 영사 업무을 봤던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이 신동공사(紳董公司)를 조직해 응봉산 일대에 공원을 만든 것이 그 효시다. 이후 현재 인천여상 자리에 동공원, 1911년에는 총독부가 주제 반포한 월미도 풍치지구 설정, 1933년 송도유원지 개설 등이 공원 개념의 작은 줄기들이다. 개괄적으로 볼 때, 시대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사회성을 포괄해 이들 공원에 대해 인간이 집착하게 되는 요인을 굳이 꼽자면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해진다. 초록을 갈구하는 유전적 요인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 공약수로서의 초록이라는 것이 그 한계다. 때와 공간을 불문하고 안정적 삶의 최고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 앞에 영원한 것도 일시적인 것도 다만, 미추(美醜)의 경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여름휴가를 맞는 인천사람들의 로망은 ‘송도해수욕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공공유원지 위락시설 제 1호로 등재된 ‘송도유원지’는 그야말로 경인지역 최고의 놀이시설이었다. 바닷물을 막아 만들어 놓은 해수욕장과 보트장, 조수에 따라 길이 열리는 아암도, 물 위에 떠 있는 정자 형태의 식당, 민물을 담수한 낚시터, 2층짜리 아담한 호텔, 야영장, 꽃과 등나무로 정비한 쉼터 등이 그것이었다. 물론 일제에 의해 기초가 닦인 우울함이 있지만, 이제 대한서림 앞 정류장에서 6번이나 8번 버스를 타고 조개고개를 넘어 미루나무가 도열해 있던 호젓한 송도 길은 꿈에서나 그릴 일이 되었다.
인천은 무죄의 도시다. 어머니 젖가슴 같은 갯벌을 시멘트로 발라대고 물길을 막아 아파트를 짓고 나무숲이 그리워 애 닳는다 해도 골프장은 우후죽순 생겨나기 때문이다. 늙다리 선배가 부채질하던 손을 놓고 한 마디 거든다. 이보게, 아우님! 이번 여름엔 인천 앞바다에서 자맥질하다가 구천을 떠돌게 됐다는 망둥이란 놈 살려주러 덕적도에 가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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