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화(萬里花) ‘시 다락방’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06 20:55:59
지역문화네트워크
만리화(萬里花) ‘시 다락방’
이 종 복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서슬 퍼런 지난 군부독재시절, 밑둥치 터진 자루에서 붉은 팥 쏟아지듯이 시인들은 쏟아져 나왔다. 이종구 선생이 한 알 한 알 세심하게 그려 넣은 ‘붉은 팥’ 그림을 보면 아름답다 못해 징글맞고, 징글맞다 싶다가도 이내 허파에 팥 한 줌 박힌 채 무겁게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런 감상들이 간혹 떠올려진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화엄경을 둘러댈 수밖에 없는 이 기막힌 상황판은 지난 시절의 불우함을 탓한다거나 예측 불허한 미래상을 어줍지 않게 제시하려는 농짓거리가 분명코 아닐 진데,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처럼 딱 들어맞는 우리 삶의 현장에 돌장승들을 도시 곳곳에 포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배다리 시 다락방은 시방세계의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었다. 지난 세기 후미에 양산된 양심 속 종양이었다. 시어를 품고 시의 이파리를 뜯어 먹어야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이다. 멀리, 다방을 전전해가며 시낭송회를 주도했던 선배 세대들조차 이다지 번듯한 멍석을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 ). 배다리가 한 어머니를 만들고 한 어머니는 무량의 시 다락방을 기어코 만들고 말았다. 배다리가 배다리이기를 진작부터 포기해버린 지난 한 세기 전, 그 후 1973년 배다리 헌 책방 세계로 뛰어든 가난한 철부지를 정착시킨 것은 결혼자금 32만원을 선뜻 내어준 유정란 씨였다. 청소부로 근근한 삶을 엮어가는 님이지만 이름값대로 다음 씨앗을 맺게 해준 고마운 그릇이었다(有精卵 필자 주). 35년 넘게 헌 책을 팔아왔지만 한 시도 그 그늘의 시원함을 잊은 적이 없다는 곽현숙 선생은 시 다락방을 만들게 된 일화를 너부죽이 게워내고 있었다. 혹시 토해낸 것에 그릇된 게 있을지 모른다면서.
IMF를 겪으면서 나동그라지는 배다리 헌 책방 일대를 살려보자고 2003년 모 구청장이 주민요구를 듣던 차에 곽현숙 선생은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졸지에 이청준 소설의 <병신과 머저리>가 되고부터는 알짜 속마음으로 구상해 만든 것이 ‘아벨전시관’이었고 그 후신이 ‘시 다락방’임을 뇌까리셨다. ‘시 다락방’의 배후는 너무도 명백했다. 배다리에서 태어났으니 배다리에서 죽겠다는 단호함과, 먹고 살아야겠는데 먹고 살 길이 헌책방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데, 불식간에 도로를 낼 것이니 ‘알아서 잘 살라는’ 지방정부의 위협에 맞춰 ‘알아서 잘’ 만든 것이 ‘시 다락방’이었다는 거였다. 한갓 미물도 제자리에서 똬리를 수십 년 틀게 되면 영물취급을 받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헌 책방 35년 동안 손을 거쳐 간 책만도 수 백 만권은 넘을 것이고 작자와 출판사, 세월 따라 변해가는 책의 이력을 온몸으로 감지한 것만으로도 십 수개의 학위쯤은 받을만한 처지가 아녔는가 말이지.
사람은 삶과 앎이 연음현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댓말이다. 헌 책방에서 35년을 보낸 곽현숙 선생이 넌지시 최후의 맹세를 고백하겠다고 하신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고, 베풀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에요” 라고.
다시, 또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그간 시 다락방 그 아름다운 멍석에서 사람의 향기 내뿜으신 시인들이 어언 열 손가락을 넘어섰다고 한다. 랑승만 시인, 강태열 시인, 김윤식 시인, 김학균 시인, 이가림 시인, 이경림 시인, 김영승 시인, 채성병 시인, 홍명희 시인, 김구연 시인, 정송화 시인, 이세기 시인, 장석남 시인, 김영언 시인, 정승렬 시인, 김미애 시인(무순) 등이다. 그리하여, 시 다락방은 세세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배다리의 메아리이고, 고된 사람살이를 즐겨 꽃피우는 만리화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너무도 명백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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