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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고려사의 복원

by 형과니 2023. 6. 4.

고려사의 복원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11-02 19:13:47

고려사의 복원


<古墓荒頹百日幽 千年往跡夢悠悠 如何柱作不歸客 魂付蜀鵑啼未休>


풀이하면 이러하다. “퇴락한 옛무덤이라 대낮에도 어둑하니/천년에 걸친 자취 꿈인양 아득하다/어찌타 황혼길을 가셨을까/혼이야 촉나라 두견새 처럼 쉬지않고 울어대네” - 강화도 출신 학자 화암(華菴) 유형석(兪衡錫)의 칠언시 ‘홍릉소감(弘陵所感)’이다. 그 분은 수많은 시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는데 80년대에는 전국노인백일장에 참가 서예부분 등에서 장원을 했다.

사적224호 홍릉은 강화읍 국화리 고려산 동남쪽 청소년 야영장 입구에 위치한다. 고려 23대 고종의 능침인데 왕릉으로서는 초라하다는 느낌이다. 그나마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조선조 현종때 유수 조복양에게 명하여 답사하고 왕씨로 하여금 능참봉을 내리며 춘추로 관리케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여러 왕릉에 비하면 망국의 여한이 어떠했음을 교훈하는 대목이다.

고종은 1232년 대륙군 몽골의 내침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천도, 재위의 전기간이라 할 39년 동안 항전했다. 그는 참으로 불우한 왕이었다. 무신 최씨 일가의 수대에 걸친 권세와 몽골의 침구로 국란이 겹치는 파란의 일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처님의 도움으로 침략군을 물리치고 온국민의 정신적 단합을 촉구하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이제현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재위하기를 거의 50년이었으니 대개 학문으로써 그 덕을 쌓고 두려워함으로 그 위를 보전하니 백성이 기뻐하고 하늘이 도왔다” - 이런 평도 있다. 안으로는 권신들이 서로 잇달아 국정을 독단하고 밖으로는 몽골이 군사로 해마다 침노하니 당시 국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소심으로 법을 지켰으며 모든 부끄러움과 치욕을 참음으로 보위를 온전하게 하여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옴을 보게 되었다. 적이 이르면 성을 굳건히 하여 굳게 지키고 물러가면 사자를 보내 좋게 교통했고 태자를 보내 친조하게 한 까닭에 마침내 사직을 지키고 국조를 길이 전하게 했다.

지난주 강화군의 ‘홍릉대제’에서 고려사 복원의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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