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마를 타고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10-27 18:20:41
꽃가마를 타고서
서양 여인이 두명의 가마꾼이 멘 가마를 타고 즐거워 한다. 가마라고 하지만 지붕없는 의자 모양이어서 남여라고 해야 옳겠다. 곁에는 자전거에 앉은 남편이 함께하고 있다. 창영동 선교사 저택의 현관에서 이다. 자전거의 주인공은 케이블이요 가마를 탄 여인은 부인이다. 가마를 호기심있게 여겼던 듯하는 모습이다. 누구든 다른 문화를 접하면 신기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전망차자가 입수한 몇장의 사진중 한 커트이다. 케이블 선교사는 1899년 내한하여 연희전문 교수를 거쳐 인천지방에서 활약했다. 특히 계산동과 박촌 일대에서 였다.
가마는 예전 집 모양으로 꾸민 탈 것이었다. 앞뒤에서 가마꾼이 두명 혹은 넷이서 들거나 어깨에 메고 운반했다. 가마는 이용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벼슬 품계에 따라 달랐다. 임금이 타면 연(輦)이요 그것을 말이 앞뒤에서 메면 가교(駕轎)였다. 연과 비슷해도 공주용이면 덩이요 외바퀴로 굴려 종이품 이상 고관이 타면 초헌(招軒)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자 처럼 지붕을 얹으면 보교(步轎)요 지붕없이 의자뿐이면 남여(藍輿)인데 남여는 정삼품용이었다.
가마에 관한 속담도 여럿 있다. “가마 타고 시집가기는 틀렸다”는 격식차려 일하기는 어렵게 되었다는 뜻이요 “가마 타고 옷고름 단다”는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다가 임박해서야 다급히 서둔다는 뜻이다. “쌍가마 속에도 설움은 있다”는 겉으로는 좋아보이나 누구나 저마다의 걱정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가마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기와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바퀴 달린 가마 그림이 나타난다. 하긴 이집트와 페르시아 유적의 회화에서도 가마 형태가 보인다. 고대 로마에서는 황후나 귀족 부인에게만 가마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전래결혼식 풍습은 신랑이 승마하고 신부는 가마를 탔다. 이것이 꽃으로 장식한 꽃가마요 꽃가마 꿈은 큰애기 시집간다는 예고요 “꽃가마를 타다”라고 하면 혼례를 치렀음의 표현이었다.
월미공원내 전통정원에서 있은 전통혼례식 꽃가마 행렬 보도사진이 아름답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