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학교 자리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10-27 18:22:12
경찰학교 자리
오늘날의 부평역 일대를 ‘동수재이’라고 불렀다. 특히 부평읍 사람들(오늘의 계산동)이 변방을 부르듯 했다. 동수재이란 옛 부평군이던 시절 동소정면(同所井面) 관내였던데서 기인한다. ‘동소정’이 동수재이로 아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소정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부평역전 로터리 인근에 직경 5m가 넘고 물이 흔한 대동우물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모두 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동소정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부평역 인근을 동소정면 대정리(大井里)라고 한 것을 보면 큰우물이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었던듯 하다.
이를 유래로 하여 북구 부평6동은 부평2동에서 분동할때 동수동(東樹洞)이라고 했다가 부평6동으로 굳혔다. 동수재이라는 속명을 미화하여 그렇게 칭했다. 동수동이라는 이름은 인천시내 전철역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평6동 관내에는 성모자애병원과 경찰학교 청각장애학교인 성동학교 등이 소재한다. 만월산의 긴 줄기를 뒤로 하고 자리한 경찰학교 터는 원래 박문여자고등학교 자리였다.
박문여고는 1940년 일제강점기에 인천소화고등여학교로 시작되었다. 당시 부평동의 동명이 일왕의 이름인 소화정(昭和町)이었기 때문이다. 인천의 거부 석계 장석우씨가 4년제 여학교로 설립했던 것인데 45년 해방과 더불어 천주교회에 양도되고 그 해 6년제의 박문여고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10여년후 1956년 박문여고는 부평에서 현재의 교사로 신축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경찰학교가 들어섰다.
장석우씨는 강화군 출신으로 젊어 고생끝에 사업에 성공했다. 작고언론인 고일씨는 ‘인천석금’에서 30년대 인천의 부자를 논하면서 세번째로 그를 꼽았었다. 그는 육영사업에 뜻을 두어 창영초등학교에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는 한편 여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이를 두고 신태범 박사는 ‘개항후의 인천풍경’에서 최승우씨의 동산고교와 더불어 인천의 체면을 세웠다고 칭송했다.
54년의 부평시대를 마감하고 경찰종합학교가 아산으로 이사했다. 17만㎡의 부지에 시민을 위해 다양한 기능 시설로 배치하리라지만 하나 둘 인천을 떠나는 것이 어쩐지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