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시화전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10-27 18:18:19
이규보 시화전
<정우7년 초여름 나는 좌사간 지제고에서 계양의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산기슭의 갈대 사이에 있는 마치 달팽이의 깨진 껍질 같은 다 쓸어진 집을 태수의 거실이라고 하였다. 구조를 살펴보니 휘어진 들보를 마룻대에 걸쳐놓고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위로는 머리를 들수없고 아래로는 다리를 뻗을수 없다. 더운때를 당하여 여기에 거처하면 마치 깊은 시루속에 들어가서 찌고 지짐을 당하는것 같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의 글이다. 52세 되던 1219년 탄핵되어 계양의 ‘도호부사병마금할’이 되어 계양에 부임하였다. 서울에 비해 시골이라 보잘것 없었다. 거처하는 곳도 누추하여 식구들이 모두 싫어했지만 그는 스스로 자족하고 즐긴다며 ‘자오(自娛)’라 당호를 짓고 연유로 ‘계양자오당기’를 썼다. 자오당터는 ‘오늘의 북구 계산동 문묘 뒤’라고 류희강의 ‘향토 인천의 안내’ 책자에 적혀있다.
이규보는 고려 고종때 문신으로 당대뿐 아니라 고려 전시대에 걸쳐 뛰어난 문장가이다. 고려 중엽 무신의 집권으로 문신이 수난을 당하던 때를 시작으로 몽골의 침략으로 국기가 흔들리던 시대를 거쳐간 인물이다. 어려서 시작에 능했다고 전하며 벼슬이 한자리 오를때 마다 즉흥시를 지었다고 한다. 특히 24세때 부친을 여의고는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지었다는 ‘동명왕편’은 대륙군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고려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운 명작이다.
이규보는 계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오당기’ 뿐만 아니라 ‘초정기’와 ‘망해지’등을 남기고 있다. ‘초정기’는 처음 부임해 왔을때 무너진 풀잎지붕 정자를 다시 세웠음을 적고 있다. ‘망해지’는 한강수가 넘쳐나 마치 바다를 바라보는듯 하다고 해서 쓰여진 이름이다. 초정터는 지난날 부평초등학교에서 바라보이는 동편의 작은 언덕이거나 계산동 남쪽으로 추정했는데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고 분간 조차 불가능하다.
만년에 시와 거문고 그리고 술을 좋아했다고 해서 삼혹호(三酷好)선생으로 불리던 이규보-지난주 계양구 청사에서 그분의 서화예술대전 입상작 전시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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