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세가인의 가야금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11-18 14:54:58
절세가인의 가야금
<버렸던 가얏고를 줄얹어 놀아보니/청아한 옛소리 반가이 나는고야/이 곡조 알 이 없으니 집겨놓아 두어라>
조선조 시조시인 윤선도의 가야금 시조이다. 가야금은 공명판의 오동나무 판에 명주실 12줄을 매고 줄마다 기러기발을 받쳐 손으로 뜯어 연주하는 고유의 우리 현악기이다. 옛날 가야국에서 만들어진 악기라는 뜻에서 가야금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가야금이 만들어진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이미 신라 자비왕때 백결선생이 금(琴)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신라 내해왕때 물계자가 금을 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밖에 경주시 황남동 고분에서 발굴된 한 토기에 가야금을 치는 그림이 있으니 그 고분을 미추왕릉으로 추정할때 가야금의 연대는 3세기경으로 소급된다.
백결선생이 금을 잘 탔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백결선생은 경주 낭산 기슭에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어 사람들이 그를 백결(百結)선생이라고 불렀다. 어느해 세모에 집집마다 들리는 떡방아 소리에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과세를 합니까”라며 걱정하자 그는 거문고로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했다고 한다.
신라에서 거문고의 명인이라면 백결선생이요 고구려에서는 왕산악(王山岳)이다. 그는 고구려 말기 거문고의 대가로 중국에서 도입한 칠현금을 개조하여 100여 곡의 악곡을 지어 연주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면 학들이 날아와 날개를 펴고 덩실덩실 춤출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이 현학금으로 오늘에 전한다. 가야금은 오늘날에도 현대 감각에 맞게 창작 연주되고 있다.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에서 “성낸 물결같이 수풀의 벌레 소리같이 끊어지듯 가야금에 얼리어서 높고 낮은 음파는 부드러운 밤공기를 헤치고 멀리까지 울려 나갔다”고 했다. 가야금은 오늘날에도 현대 감각에 맞게 창작 연주되고 있다.
부평여고의 가야금 동아리 ‘절세가인’이 인천시교육청이 개최한 전통음악경연에서 2년 연속 최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