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조끼로 성공한 주봉기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2-30 14:54:11
양복 ‘포켓’ 착안한 ‘조끼방’ 성황
(48) 조끼로 성공한 주봉기
인천 이야기를 읽는 일이 참으로 흥미롭다. 굳이 정사(正史)가 아니라도 우리 선조들이 걸은 발자취와 남은 사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며, 연달아 몇 번 인천 사람들의 창의성과 모험정신, 그리고 현실적인 응용력 등을 지면에 옮기는 것도 그런 소이이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들은 특히 그 문장의 유려함과 함께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감칠맛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당시의 풍습이나 풍물, 정치, 사회의 이슈, 경제, 예술, 스포츠 등에 대해서 누구도 따르지 못할 세밀한 기록과 묘사를 남겼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도 기실 신 박사의 명저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 발견해 낸 재미있고 독특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개항 후 신문물이 밀어닥치고 삶의 모습이 급격하게 뒤바뀌어 가는 신흥 도시 인천의 환경에 잘 적응해 가면서 급기야 거부로 성공하는 인물의 이야기인 셈이다.
“입성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포목전이 내동 거리에 생겨났다. 주명서(朱命瑞), 장내흥(張乃興), 김용태(金鏞泰) 세 사람이 동업한 ‘서흥태(瑞興泰)’가 으뜸이고 정순택(鄭順澤), 최봉현(崔鳳賢), 주봉기(朱奉基), 최의암(崔儀岩), 이창문(李昌文), 김정돈(金正敦) 등의 포목점이 뒤를 따랐다. 비단옷감, 배자, 남바위, 털토수 같은 고급상품도 있었으나 주로 일반용인 광목과 옥양목 같은 수입 면직물과 토산인 모시와 삼베가 많이 팔렸다. 장내흥과 김용태는 여기서 기틀을 잡은 후 물산 객주로 성공하여 경제계의 원로가 되었다.
주봉기는 서울에서 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내려와 조끼방을 차린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복에는 휴대품을 담는 구조가 없어 주머니를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불편이 있었다. 당시 돈지갑, 권련, 성냥 같은 개화 물품이 새로 생기어 불편이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던 차에 눈치 빠른 사람이 포켓이 붙어 있는 양복 조끼에 착안하여 한복에 알맞은 조끼를 창안했더니 이것이 온 장안에 크게 유행했다. 때마침 미국으로부터 ‘싱거(Singer)표’ 재봉틀이 수입되어 종로에는 조끼방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주봉기는 신흥 도시 인천을 택한 것이다. 생각한 대로 조끼는 불티나게 팔려 주씨(朱氏) 일문은 포목점만이 아니라 형이 되는 명기(命基)는 정미소, 아우 되는 정기(定基)는 연초와 석유 대리점 등 사업을 확장하여 인천의 지방 재벌로 크게 성장했다. 정미소를 승계한 막내아우 원기(元基)는 광복 후 경기도 도의원으로 활약했다.”
이것이 주봉기란 인물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신태범 박사의 기록이다. 주봉기가 신식 조끼를 창안해 낸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재빨리 인천이라는 시장에 적용하여 성공한 인물이란 점과 함께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발력과 모험심과 도전정신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를 비롯해 그의 형제들은 이 같은 장점 외에도 상인으로서 우의와 근면과 친절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1914년 6월 16일 조선인인천상업회의소에서 발행한 ‘인천상계월보’ 26호에 실린 ‘형제상점의 由來’가 그것을 말해 준다. ‘형제상점’은 그들이 성공하기 전에 차렸던 외국잡화 가게이다. 말미에 “본항(本港) 선인측(鮮人側)에 대하야 모범 상업가라 가위(可謂)하겠더라”라고 적고 있다. 근 한 세기 전의 인천 시민의 이야기이다.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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