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우구락부
仁川愛/인배회
2010-01-31 14:04:21
모양새는 ‘국악동호인’ 모임 알맹이는 신간회 중추 역할
(51) 이우구락부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崔銑卿), 송균(宋均), 서병훈(徐丙薰)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우구락부 사진. (1927년 4월9일 동아일보))
고 고일(高逸) 선생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에 나와 있는 이우구락부에 대한 설명이다.
이상한 것은 대표인 하상훈(河相勳)과 이범진(李汎鎭)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확실한 결성 연대도 알 수는 없지만, 1924년에 제7차 연차 정기총회를 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립 시기는 1917년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1910년대이면 이미 경인기차통학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결성되었을 때이다. 이 친목회를 모체로 1920년 6월 야구단 한용단(漢勇團)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이우구락부는 한용단이나 인배회 같은 청년단체보다는 앞서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립 멤버들의 출생 연대가 1880~90년대인 점을 미루어 보아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대 시민 강연, 토론 등을 통한 지식 계발이나 체육을 통한 체력 증진, 풍습 개선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 ‘이우구락부는 우리 고유문화의 부흥을 위해 결성’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단체가 생겨난 것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회원들의 자각과 민족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우구락부의 활동상에 대해서도 한두 가지 외에는 기록이 없다. 『인천시사』에도 국악동호인 모임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이우구락부가 동아일보인천지국을 경영한 것으로 쓰고 있다. “각과장(各課長)의 1년간의 사업보고와 식산과(殖産課)의 보고를 마친 후 이어서 동부(同部)의 경영인 동아일보 인천지국의 1년간 영업보고를 필(畢)하고” 운운하는 1924년 4월 16일자 기사가 그것이다. 아마 회원들이 공동으로 동아일보인천지국을 운영하면서 최 연장자인 하상훈으로 하여금 지국장을 맡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고일 선생은 이우구락부 회원들을 ‘죽림칠현’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점 수긍이 가지 않는다. 혹, 일경(日警)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이우구락부 회원들의 ‘가면(假面)’을 잘못 보았던 것일까.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은둔과 한가(閑暇)’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신문사 지국 경영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 7월 4일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가 일제 때 경찰을 지낸 이중화(李重華)에 대한 증인 심문에서 인천 경동 거주 김대련(金大鍊)은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당시 본인도 동지 이범진, 하상헌(河相憲) 등 30여 명이 이우구락부를 조직하여 가지고 신민회라는 정치비밀결사로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중화가 차(此)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명도 동인(同人)에게 체포된 사실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우구락부가 신간회의 중추였음은 하상훈이 인천지회장을 맡은 것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하루 바삐 이우구락부에 대한 재평가와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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