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겻불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2-24 15:53:32
처치 곤란 ‘왕겨’ 온돌방 군불거리로
(47) 겻불
본란에 ‘인천 사람의 창의성’이라는 글을 쓴 것이 지난 11월 20일자이다. 내용인즉 경동 소재 구둣방 삼성태(三盛泰)의 주인 이성원(李盛園)이 발명해 낸 경제화(經濟靴)와 용동의 채소점 주인 안기영(安基榮)이 창안한 남녀 고무신 이야기를 썼다. 이밖에도 냉면을 정식 음식 상품으로 규격화시킨 것과 함께 얼음을 첨가해 여름철에도 상식할 수 있게 변모시킨 인천 사람의 아이디어나, 생선 귀신이라는 일인(日人)들보다도 앞질러 신포동(실제 행정구역은 내동이다)에 생선전을 개설한 인천적인 창의와 모험 정신에 대해서도 누차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같은 창의와 모험심은 개항과 함께 밀어닥친 문물과 더불어 수많은 외국인이나, 외지 유입 인구들과 뒤섞여 피차 경쟁하고 또 수용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천의 특성일 터이다.
이 추운 겨울, 문득 이야기하려는 쌀겨나 겻불은 그것이 그다지 대단한 발명이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라 해도 역시 인천이라는 입지, 인천이 가지고 있는 사회 경제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발생한 창안 정신, 실용 정신의 한 면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업집과 넉넉한 집안에서는 참나무나 소나무 장작을 땠었는데 장작 시장은 인천여상고(仁川女商高) 언덕 아래인 모랫말(사동 해변)에 있었다. 솔가지 단나무[葉松]는 소바리나 지게로 팔러 다녔다. 차츰 매갈이간과 정미소에서 나오는 섬에 담긴 겨를 온돌방 군불거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겨를 풀무질해 가면서 취사용으로 사용하는 알뜰한 집안도 생겨났다. 겨는 일찍이 인천이 개발한 값싸고 독특한 우리의 땔감으로 살림을 보탰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실린 구절이다. 신 박사처럼 겨를 “인천이 개발한 값싸고 독특한 우리의 땔감”이라고 백 퍼센트 단정할 수는 없다 해도, “차츰 매갈이간과 정미소에서 나오는 섬에 담긴 겨를 온돌방 군불거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겨를 풀무질해 가면서 취사용으로 사용하는 알뜰한 집안도 생겨났다.”는 행문에서 이 이전까지는 겨를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천은 쌀 수출항으로 경기 일대의 모든 쌀이 모여 들었다. 초기에는 벼를 수출했으나 백미로 수출하는 것이 훨씬 운임이 절약되는 까닭에 1890년대 이후 쌀의 도정을 위해 인천시내에는 정미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니 부산물인 겨가 엄청나게 생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왕겨를 처치하기가 곤란해서 초기에는 만석동 부근 바다에 내다버리는 사태까지 일어났으나, 결국은 인천 사람들의 지혜가 이 왕겨를 연료로 변모시킨 것이다.
실제 겨는 화력이 그다지 세지 못해 연료로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그것을 인천 사람들이 풍구로 풀무질을 해서 화력을 올려 온돌방에 군불을 때거나 취사용으로 썼던 것이다. 이처럼 저장과 운반에 있어 다소의 불편은 있어도 소리 없이 타 들어가는 알뜰하고 훌륭한 연료로서 겨의 효용성이 높아지자 1930년대 중후반에는 수시로 가격이 폭등하거나 품귀 현상을 빚어 서민들의 생활에 많은 불편과 고통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겨가 인천이 개발하고 상용화시킨 요긴한 연료였다는 점만은 결코 부인할 수가 없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고 하지만 허세를 버리고 겻불로 겨울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운 우리 인천 선조들의 실용 정신에 새삼 머리를 수그리게 된다.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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