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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50) 세종임금과 부평 온천

by 형과니 2023. 6. 7.

(50) 세종임금과 부평 온천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1-31 14:01:08

 

溫泉탐색 실패 부평현강등 혼쭐

(50) 세종임금과 부평 온천

 

 

조선 500년 최고 성군(聖君)으로 온 국민이 추앙하는 분이 세종임금인데 민망하게도 그 묘호(廟號)를 따서 붙인 세종시(世宗市)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들쑤시고 있다. 이 지경이 된 것이 정치때문일 터인데,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거기에 세종을 갖다 붙여 지하에 계신 임금께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는지.

 

수정안대로라면 우리 인천도 그다지 유익할 것이 없다는, 이른바 역차별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도 있지만, 어쨌거나 역사적으로 세종과 우리 인천은 그다지 좋은 인연을 가지지 못했었던 것 같다.

 

특히 부평지역이 온천(溫泉) 문제로 세종 때에 아주 혼쭐이 났었다. 그 이야기는 몇 해 전 어느 신문에 썼던 적이 있는데 대략 몇 줄 옮기자면 이렇다.

 

세종이 부평에서 온천을 찾느라고 고심했던 이야기와 온천 탐색에 실패한 노여움으로 마침내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킨 일화는 세종201113(계사) 실록에 보이는데, ‘부평부(富平府)를 강등하여 현()으로 하였다. 임금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번 조관(朝官)을 보내어 찾아보았으나, 아전과 백성이 고의로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므로 깎아내려서 현으로 삼았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등에는 부종(浮腫)이 있는 데다가, 시력까지 약했다. 이에 대신들이 온천욕을 권유하면서, 온양 온천에 행차해 목욕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효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거둥에 불편을 느끼던 차에 서울에서 반일(半日)’ 거리인 부평에 온수가 난다는 말을 듣고는 즉각 탐색을 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천 탐색은 실패로 돌아가고 세종은 그 까닭을 부평의 관민들이 자신의 거둥에 따른 민폐를 우려하여 숨겨 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온천이 있다는 곳이 정확하지가 않아 수차에 걸쳐 많은 인력이 부평현 관사, 향리(鄕吏)의 집, 민가, 전원(田園)에 이르기까지 파지 않은 곳이 없을정도로 갈팡질팡했다고 한다. 세종22(1440) 8, 임금의 절박한 심정은 이렇게 인천시사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금년 말까지 기한을 줄 것이니 그때까지 고하지 아니하면 수리(首吏)는 경기지방의 황폐한 역의 이서(吏胥)에 보충시킬 것이고, 품계 있는 관원이나 여러 대 거주한 백성이 자기 집터나 전장에 온정이 있음을 고하지 않은 사람은 타향에 내쫓을 것이고, 타인으로서 그 감춘 일을 고한 자는 논상케 하라.”

 

그러나 5년 가까이 부평 일대를 들쑤시던 끝에 결국 온천 발견의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세종이 함길도에 압송했던 자를 반환시키고 온천 소재를 고하지 않은 자의 논죄를 중지시키면서 종결된다. 그리고 세종28(1446)에 온천을 감추었다는 죄목으로 강등시켰던 부평을 도호부로 되돌린다.

 

이후에는 세조 때 한 차례 더 부평부 남급(南級)의 집에 온천이 있다 하여 신숙주(申叔舟) 등을 보내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으로 부평 온천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전해오지 않는다. 세종 때 진저리가 난 부평 사람들이 그 뒤로는 온천이란 말조차 꺼내는 것을 금기로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세종시 문제 때문에 엉뚱하게도 세종 때 있었던 인천 부평의 미스터리 온천 이야기로 비화했다. 세종시 문제! 국력의 낭비를 막으면서 지하의 세종 임금께도 면목이 서는 최선의 방책은 어떤 것일까.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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