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단연동맹회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1-31 14:08:27
“담배 끊어 나라 빚 갚자…” 온국민 丹心으로 일어나
(52) 단연동맹회
새해가 되면 흔히 개인이나 단체나 새로운 포부를 밝히고 계획을 세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신년 벽두면 아주 단호하게 금주, 금연을 작심하는데 이것이 불과 3일 만에 제 자리로 돌아가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요즘에는 소속 회사나 단체가 나서서 금연 운동을 벌이는 데다 또 아예 인사 고과로도 다루고 있어 끽연가들을 벼랑으로 몰아세운다.
이 같은 금연 운동은 지금으로부터 꼭 한 세기 전, 이 나라 전체에서 열화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당시의 금연 운동은 요즘처럼 건강만을 따져서가 아니라 일제의 간교에 걸려 결딴이 나버린 국가 경제의 재건을 위해서, 그리하여 일제로부터 우리 국권을 수호하려는 뜻에서, 전 국민이 단심(丹心)으로 벌였던 이른바 ‘애국 단연(斷煙) 운동’이란 점이다.
단연 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 1천300만 원 보상취지서’가 도화선이 되었다. 맨 처음 대구를 시발로 해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벌어지고 그 모금 방법으로 단연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는 성년 남자 인구 전체가 다 흡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흡연 인구가 많았고, 나이 든 여성들 상당수도 흡연자여서 실제 그 비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국채보상운동 즉 단연 운동은 실로 전 국민의 동참 속에,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그 상황들을 전하는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 해 3월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부친인 이경선(李敬善)이 의연금을 출연했다는 이야기와 서울영어학교 일반 생도들이 농상대신(農商大臣)의 흡연 행위를 비난했다는 기사들이다.
한편 이 단연 운동의 열화는 거의 동시에 인천에 옮겨진다. “인천항신상회사(仁川港紳商會社)에서 박원순(朴元淳), 정재홍(鄭在洪) 등 제씨가 단연동맹회를 조직하고….” 운운하는 것이 2월 23일자 매일신보 내용의 일부로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에 실려 있다.
박원순에 대해서는 전라도 무안 출생으로, 1897년 설립된 인천항신상회사의 중역이라는 기록만 남아 있다. 1907년 일진회(一進會) 회장인 친일파 박영효(朴泳孝)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뒤 권총 자결한 애국지사 정재홍 역시 인천항신상회사 중역이었다. 그는 서울 출생이었지만 인천에 인명의숙(仁明義塾)을 설립해 후학을 교육한 교육자이면서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인천지회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인천에서의 단연 운동 경과나 모금 액수 같은 것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4월 17일자 신문 기사 “대한운수회사(大韓運輸會社) 인천지점 단연동맹의 김명환(金明煥)씨 등 36인은 제2회 의금(義金)으로 7원20전을 기성회(期成會)에 전달”했다는 한 예로 미루어 인천 전체에서 적지 않은 모금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운동은 결국 일제의 마수에 의해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20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재차 금주단연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배를 끊어 애국하려던 이 나라 선조들, 단연으로 나라 빚을 갚으려던 옛 인천 인물들의 눈물어린 노력은 오늘에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인천 시민들이여, 새해에는 굳은 결심으로 담배를 끊어 보자.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면서, 한편 그것을 국부(國富)의 길로 생각했던 한 세기 전 우리 선조들의 따듯한 마음씨도 새겨 보자.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3) 지진-1905년 인천에 최초 地動計 설치 (0) | 2023.06.09 |
---|---|
(49) 인천관측소 (0) | 2023.06.08 |
(51) 이우구락부 (0) | 2023.06.07 |
(50) 세종임금과 부평 온천 (0) | 2023.06.07 |
(48) 조끼로 성공한 주봉기 (0) | 2023.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