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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49) 인천관측소

by 형과니 2023. 6. 8.

(49) 인천관측소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1-09 18:01:13

 

1904년부터 나라 안 기상예보

(49) 인천관측소

 

 

경인년 새해 출근 첫날인 지난 4일에 쏟아져 내린 폭설로 이곳저곳 소통이 아직도 원활치 못한 데다가 강추위까지 기승을 부려 도시는 가히 몸살을 앓는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삼한사온(三寒四溫)도 사라지고 수년 동안 눈다운 눈조차 내리지 않아 맥없는 겨울로 치부하고 살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천에만 무려 22.3의 기록적인 양의 눈이 내려 쌓였고, 서울도 25.8로 기상 관측사상 최대의 강설량을 기록한 것이다.

 

폭설 당일부터 시민들은 말할 수 없이 큰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원망과 구설(口舌)을 꼼짝 못하고 들을 수밖에 없는 곳이 기상청이다. 강설 예측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기상청이 예보한 서울, 경기 지방의 당초 예상 강설량은 2~7정도였으니 틀려도 아주 크게 틀리고 만 것이다. 인천의 경우도 1973122230의 눈이 내린 이후 37년 만의 폭설로 눈 폭탄이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대단했다.

 

모 일간지의 또 예보 빗나간 기상청이란 제하에 이처럼 많은 눈이 예상될 때는 미리 대설 예비 특보를 발령해야 정상이지만 기상청은 눈발이 굵어지던 4일 오전 530분에야 예비 특보 없이 바로 서울·경기 지역에 대설주의보(눈이 5이상 내릴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를 내린 것이다.”라는 질책성 기사를 보면서 또 한편 기상청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그 기상청이 우리 인천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땠을까. 예보가 빗나갈 때마다 공연히 우리 인천 사람들이 온 나라에 대해 죄나 지은 것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고 살았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었을 듯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록 일제에 의해서였지만 우리나라 근대적 기상관측이 19044월 인천에서 시작된 이래 1953년 중앙기상대 업무가 서울로 이관될 때까지, 반세기에 걸쳐 나라 안의 기상 예보를 인천관측소가 맡아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에도 관측소의 경성 이전 계획이 있었던지 193689일 동아일보 기사는 인천관측소의 서울 이전을 인천의 한인, 일인들이 맹렬하게 반대한다고 쓰고 있다.

 

아무튼 1907219농상공부 측후소, 지소의 위치와 명칭을 관보에 실을 것을 요구한 통첩(通牒) 의정부주사(議政府主事) 황의정(黃義正) 39에는 우리나라 측후소 체제가 이미 인천측후소를 필두로 경성지소, 평양지소, 대구지소로 되어 있어 인천이 중앙이었음을 알 수 있고, 광복 후인 1946126일에는 인천관측소를 국립관측소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와 같이 인천관측소는 나라 전체의 기상 예보를 내는 한국의 중앙기상대였던 것이다.

 

한 예로 193416일 인천관측소에서 전 조선에 발령했다는 강추위 경보를 보도한 신문 기사가 눈에 띈다. “연말까지만 하여도 기후가 퍽 온화하여 -윈터와 같은 감이 없지 않더니 3일 오후부터 급격히 서북풍(西北風)이 불기 시작하여 기보한 바와 같이 인천관측소에서는 전 조선에 경보를 발하여 선박의 출입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여 왔었다.”면서 13영하 11도로 강하하여 한강 상류의 광나루 도선장은 4일 오전에 이르러 두께 3()이나 되는 얼음이 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에 폭설이 쏟아졌다는 말은 없으나 강추위가 몰아친 날짜나 기온이 공교롭게도 요 며칠간과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그랬던 것인지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폭탄과 강추위 속에서 한국 기상 관측의 선구 인천기상대가 떠오르는 것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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