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의병장 지홍일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2-28 00:07:25
강화 근거로 신출귀몰 … 일제 응징
(55) 의병장 지홍일
『고종시대사』 6집, 1909년(己酉) 2월 16일자에는 “강화를 근거로 각지에 출몰하던 의병장 지홍일(池洪一)이 개성(開城) 지방에서 피체(被逮)되어 인천경찰서에 압송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내용은 1909년 2월 19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101년 전 오늘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실려 있다. 강화를 근거로 의병 투쟁을 벌이던 지홍일(생몰년 미상) 의병장이 개성경찰서에 체포되어 관할 인천서로 이송되었다는 요지이다.
그는 1908년 4월에 의병이 되어 이듬해 1월 31일에 체포되었으니 그의 의병 활동기간은 대략 10개월 정도이다. 그러나 신출귀몰하고 용감무쌍하게 일제를 응징하던 그의 의병 활동은 왜경이나 군부 모두에게 엄청난 곤경을 안겨 주어서, 저들 왜경들이 남긴 정보 보고서라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체포에 몹시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홍일 의병장에 대해서는 조사가 미흡했었는지 『인천시사』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의 신상에 관련해서는 당시 인천경찰서장이 상부에 보낸 조사 보고 내용 중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즉 지홍일은 강화군 읍내면 출생으로 ‘정년(丁年)에 급(及)하여(곧 20세에 이르러)’ 강화진무영진위대(江華鎭撫營鎭衛隊) 병정으로 입대하여 2년 만에 부교(副校)가 되고, 이어 제주도로 파견되어 3년간 주둔하였다가 만기 제대했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는 체포 당시 그의 나이가 45세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다소 미심쩍다. 보고서에는 제대 후 곧바로 강화로 돌아오지는 않고 제주도에 3년을 더 머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기간을 합산한다 해도 45세와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체포 직후 개성경찰서 초기 수사 기록에도 그의 나이가 45세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35세까지 진위대 소속이었고 그 후 교동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4월 강화 의병장 장인선(張仁善) 휘하에 들어가 소대장이 되었다는, 앞의 인천경찰서 수사 기록과는 다른 내용이 보인다. 지홍일이 처음에는 왜경에 거짓 진술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지홍일이 아닌 다른 사람 지봉인(池奉仁)이라고 주장했다는 수사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천경찰서 조사대로 그가 제주도에서 강화로 다시 돌아온 것은 융희 2년, 1908년 봄이다. 그때는, 바로 전 해에 내려진 군대해산령으로 인해 구한국 군대가 없어졌는데, 이에 구한국군 육군대장이었던 이능권(李能權)이 일제의 해산령에 항거해 강화진위대 소속 군인 300여 명을 규합, 의병 부대를 편성한 때여서 지홍일도 아마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에 돌아온 지홍일은 이능권 휘하 김덕순(金德順), 고부성(高夫成) 등과 ‘기맥(氣脈)’을 통하고 4월말에 의병 4~50명을 인솔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불암리와 강화 및 인천 북도면 등 여러 섬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의병 투쟁 자금 모금과 왜인 징벌에 나서는 등 의병으로서 큰 활약을 보인다. 특히 9월부터는 의병대장 김봉기(金鳳基) 휘하의 돌격진 부장(副長)이 되어 투쟁한 다수의 전과가 왜경의 조사 기록에도 나온다. 지홍일의 의병 투쟁은 김봉기 대장이 서울에서 체포되면서 그가 소지했던 군자금을 찾기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개성의 한 여각에서 왜경에 체포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천에서는, 강화에서는 그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지홍일 의병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조명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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