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인천의 빙상경기 역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2-28 00:10:00
개항후 洋人들 스케이트장으로
(56) 인천의 빙상경기 역사
우리 빙상 선수들이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연일 낭보를 전해온다. 믿기지 않는 쾌거에 온 세계가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을 이제 빙상 거인으로 우러러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전 세계가 또 한 번 한국 낭자가 수놓는 빙판 위의 현란한 묘기와 예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찬탄과 부러움의 박수를 칠 것이다.
이번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는 우리 인천 출신 소녀도 보인다. 쇼트트랙 여자 1천500m 결승에서 장하게도 연수여고 이은별 양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에 아이스링크라고는 연수구에 있는 동남스포피아 한 군데가 고작인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당당 은메달을 일구어낸 것이다.
인천의 겨울철 스포츠 역사의 시초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인천 빙상의 태동에 대해서는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회고 글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현재 송림동 로터리 일대는 전부가 논이었는데 겨울이 되면 넓은 빙판으로 변했다. 이곳이 인천의 스케이트 링크 구실을 했다. 개항 후 각국지계의 양인(洋人)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한 모양이라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타운센드양행의 맥코넬 지배인은 1930년대까지 스케이트를 타러 나왔었다. 일찍이 서울에서는 양인의 스케이트 운동을 보고 얼음굿(氷藝)이니 양발굿(足藝)이라고 불렀다는데 인천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20년대가 되면서 일제 스케이트가 비교적 싼 값(2천원~3천원)으로 등장하여 학생들 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백 명 가까운 스케이트 애호가들이 모였으나 스피드와 피겨라는 경기 종목도 모르는 채 제멋대로 뛰고 돌고 할 뿐이어서 경기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인천을 내세울 만한 빙상 선수가 한 사람 탄생했다. 열 살이 되면서 스케이트를 시작하여 자기류이기는 했지만 10년 가까이 닦은 스피드와 피겨의 기량으로 경성제대 아이스하키부의 대표 선수가 된 신외과 원장 신태범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1932년부터 4년간 전일본대학대회와 전일본도시대항대회에서 활약하여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글 말미는 신태범 박사 자신의 이야기인데, 이 내용으로 미루어 신 박사가 인천 최초의 빙상인(氷上人)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신 박사 이후 1960, 70년대까지의 인천 빙상인으로는 중구 소재 옛 유명 양복점, 춘방양복점의 자제 이박 선수와 운동장 최씨로 널리 알려졌던 최승환 씨의 여식 최중희 선수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불발이었지만 인천 최초의 빙상경기는 제물포청년회가 계획한다. 제물포청년회는 1924년 2월 10일에 인천 송림리 스케이트장에서 “인천 재주(在住) 조선인 청년과 소년”을 대상으로 제1회 빙상경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체육 사상 보급’이 취지였다고 하는데 대회 위원으로 박문여학교 설립자 장석우(張錫佑), 초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하상훈(河相勳),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인공이자 한국 체육 기자의 선구 이길용(李吉用) 등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야심차게 시작했던 인천 최초의 빙상경기는 생각대로 준비가 여의치 못했던지 다음 겨울로 연기되고 만다. 인천 스포츠사에 기록될 뻔했던 이 대회는 이후 더 이상의 문건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훗날에도 영영 열리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선대들의 이런 활약과 의지가 오늘에 전해져 전 세계 빙상인 앞에 연이은 쾌거와 기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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