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인천, 86년 전 3월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10-03-15 12:15:19
‘인천 시가지 日人 소유가 7배’
(58) 인천, 86년 전 3월
금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망국의 역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고, 더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뼈아프게 새겨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3월, 이 달은 만세운동의 달이다. 민족 자각의 자주 독립 선언과 함께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졌던 달이다. 그것이 국치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 이 3월의,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역사를 잊을 수는 정녕 없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이면 1924년으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5년 뒤가 된다. 만세운동으로 일시 일제가 강압 정치에서 소위 문화 정책으로 전환한 이후였지만 더욱 교묘하고 악랄한 억압과 수탈에 신음하기는 전과 다름없던 시기였다.
인천에도 그때의 기록이 한두 가지 남아 있어 피눈물 나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1924년 3월 11일 동아일보에 실린 ‘인천의 시가지는 일인 소유가 7배’라는 제하의 기사이다.
“인천시내 한일인별 토지 소유 상태는 한인 소유 77정 250보, 일인 소유 228정 641보로서 일인이 한인에 비하여 약 7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제 나라 국민보다 점령자 일제가 무려 7배나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는 놀랄 것도 없다.”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은 개항 직후부터 이미 굶주린 이리처럼 인천 땅을 집어 삼키고 있는 일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이미 1880년대 말에 일본지계가 포화 상태를 이루어 서쪽으로 청국지계를 넘어 북성동, 송월동, 만석동 그리고 각국지계의 대지를 매입하거나 임대하면서 잇달아 동쪽으로 신포동, 신생동, 답동, 신흥동 일대의 한국인촌 무인지대로 백지에 물 번지듯 침투하기 시작했다.”
개항 직후가 이랬으니, 약 30년 후인 1924년쯤에는 인천은 차라리 일인의 도시라고 할 정도가 된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인천은 조선인의 손에서 떠나려 한다! 사람의 수효로 정복을 당하는 인천은 이제 토지의 정복을 당하여 간다. 일 년 동안 무역액(貿易額)이 일억 만에 달한다는 인천의 형편이 어떠하며 그 틈에 사는 조선 사람의 처지가 과연 어떠한고!”
인천부청(仁川府廳)에 시가지세(市街地稅)를 바치는 토지의 면적이 삼백오십 정, 삼 단, 칠 묘, 이 보(步)이며 이것을 평(坪)수로 따지면 일백육만 육천일백십이 평인데 이것을 가진 사람별로 나누어 보이면, 조선인 77정250보, 일본인 228정64보, 기타 외국인 49정48보.”
조선 사람의 반도 못되는 일본 사람이 인천 땅 면적의 66%를 차지하고 있고, 또 인구가 10분의 1도 안 되는 다른 외국인들이 13%를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2만8천 명 조선 사람이 고작 11%를 소유한 데 대한 통분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과 견주어 보면 조선 사람은 한 사람 평균 여덟 평가량을 가졌는데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의 칠십칠 배에 상당한 육십일 평반을 가졌다. 상해 항로가 개통되며 월미도가 공원이 되면 얼마나 조선 사람은 짓밟힐고! 정신 차릴 때는 이때라 할 것이다.”
그 기사는 이렇게 ‘인천은 조선의 것이 아니다’라는 서두와 함께 발전할수록 더더욱 일제의 손아귀에 옭매 잡힐 인천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정신 차릴 때는 이때’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기사 행간에 스민 필자의 처량하고 치욕스러운 심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86년 전 3월의 인천 사정을 읽으며, ‘땅은 정신 차려야 잃지 않는다’는 평범한 생각을 해본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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