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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경인선 통학생 친목회

by 형과니 2023. 3. 16.

경인선 통학생 친목회

仁川愛/인배회

 

2007-01-30 10:08:53

 

통학길에서 샘솟은 애국심...애국 계몽 앞장

청년운동-경인선 통학생 친목회

 

 

동아일보 1920613일자에 인천한용단 창립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인천에 살고 있는 경성 통학생들이 단체를 만들어 그 이름을 한용단’(漢勇團)이라 했으며, 단장에는 곽상훈이 추대됐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는 경성통학생들이 한용단을 만든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체육활동을 전개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년 뒤 한용단은 한용청년회로 이름을 바꾼다.

 

한용단 뿐 아니라 1920년 이후 인천에서는 많은 청년단체들이 생겨나고,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들 단체들의 대부분은 경인선 통학생 친목회출신자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선열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는 청소년으로 하여금 민족적 애국투지에 불타게 해서 한덩어리 굳은 단결체로 미래의 역군의 터전을 만든 것은 경인기차 통학생 친목회였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인천에 있던 초등학교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와 박문학교, 영화학교를 비롯해, 일본인을 위한 신흥초, 축현초 등 5곳 이다.

 

이들 학교에서 매년 400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인천에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만한 중등교육기관이 없었다. 인천남상업학교와 인천북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 3곳에서 150명을 뽑으니, 나머지 학생들은 부득이 서울로 유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1915년 무렵부터 경인선 기차를 이용한 통학 방식이 생겨난다. 유현역(현 동인천역)을 출발한 기차는 남대문역까지 55분만에 도착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18번 운행했다. 기차요금은 어른이 55전이었다. 학생들에게는 기차요금을 할인해 주었는데, 정기권으로 1개월권이 2, 3개월권이 450, 6개월권이 6원이었다.

 

1920년을 넘어서 전체 통학생 수가 한국인이 200, 일본인이 100명 정도였다. 통학생들이 꼭 지키는 불문율이 하나 있는데 남학생은 앞칸을, 여학생은 맨뒤칸을 이용했다.

 

경인선 통학생이던 신태범 박사는 인천한세기에서 객차는 의자도 넓고, 등받이가 높아 차분한 독서실 분위기이나 담화실 같은 여유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겉으론 친목도모를 위해 야구나 축구, 정구 등 좋아하는 운동동호회 활동을 벌였지만, 속내는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해방정신을 높이는 활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문학출판물을 간행해 민중계몽에 앞장섰고, 서울지역 학생들과 연계한 운동도 벌인다. 인천 유지들은 이런 청년학생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수록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 또한 강해졌다.

 

이들 중 배제’, ‘중앙’, ‘휘문’, ‘YMCA’ 등 서울지역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든 야구단이 바로 한용단이다. 인천에는 일본 하역업체를 중심으로 한 미나또와 미두취인소의 미신(米信)’, 인천철도사무소의 기관차등 일본인 야구팀이 있었다. 한용단과 미신 간 한·일 대항전이 있을 때면, 인천의 모든 가게가 철시할 정도였다 하니 그 인기를 가히 짐작하고 남는다.

 

동아일보는 1920818일자에 인천한용단이 주최하고, 이우구락부가 후원한 음악회가 가부기좌에서 열렸다는 소식을 전한 것에서 알 수 있듯, 한용단은 본래 창립 목적인 체육진흥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통학생 중 배재학교 출신자들이 많아, 이들은 별도의 모임을 만든다. 인천에 살고 있는 배재학교 학생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인배회는 설립목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사회운동을 벌인 것으로 짐작된다. 인배회 회장 출신으로 동아일보 본사 체육부 기자를 한 이길용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장본인이다.

 

한용단은 창립 1년뒤 한용청년회로 이름을 바꾼다. 그동안 한용단을 이끈 곽상훈은 총무로, 대신 박창한이 회장을 맡는다. 의사부, 문예부, 사교부, 자선부, 체육부, 음악부 등의 조직을 갖추었다. 한용단 이외에 통학생친목회에서 파생한 단체는 제물포청년회, 인천청년회, 인천소년회, 기봉단, 보이스카우트 등이 있다.

 

1924113일 창립한 제물포 청년회는 문화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한용청년회의 일부가 만들었으며, 서병설, 고일, 진종혁, 이길용, 유두희, 이덕명, 이승엽 등이 활동했다.

 

제물포 청년회는 이후 무산청년동맹과 병인청년회 등과 합쳐, 19259월경 인천청년연맹으로, 다시 19279월 인천지역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인천청년동맹으로 탈바꿈한다.

 

인천청년연맹은 인천지역 청년단체들의 연합체다. 192612일 공화춘에서 가진 신년간친회에는 인천지역 14개 단체 대표 100여명이 참석, 연맹의 활동을 평가하기도 했다.

 

언론계에서도 통학생 친목회 출신 인재들이 많이 활동하는데, 19261신문기자단이 결성된다. 여기에는 정수일, 박창한, 이동오, 이범진, 고일, 최진하 등이 관여했다.

 

당시 인천에 있던 신문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인천지국, 시대일보 등이다. 이들 신문사는 청년운동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인천석금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한용청년회노동조합운동에 헌신했고, 동아일보는 제물포 청년회신정회육성에 힘썼다. 시대일보는 인천청년동맹을 주축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지원했다.

 

신문기자였던 고일과 조선일보 인천지국장인 박창한은 소성노동회와 인천노동동맹 등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당시 가등정미소에서 선미여공에 대한 불법 구타사건이 벌어진다. 이 일을 계기로 인천지역내 모든 정미소가 동조파업에 나섰고, 부두노동자가 동정파업을 벌이는 등 인천지역 총 파업으로 확산된다. 인권유린과 민족차별에 대항한 인천지역의 민족투쟁으로 평가되는 이 일은 신간회를 중심으로, 신문기자단이 주도했다.

 

1927년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양분된 청년운동이 협동·제휴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인천청년동맹이 결성된 것도 이러한 움직에 따른 결과다. 같은해 말 좌·우익 진영은 단결을 모색하고,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한데 모은다. 바로 신간회.

 

인천에도 신간회 지부가 1927125일 결성되는데, 하상훈, 곽상훈, 강복양, 최진하, 유두희, 고일, 권충일 등이 주도한다. 경인선 통학생 중 사각모자를 꾹 눌러쓰고 경성제대를 다녔던 고유섭은 우리 미술계의 큰 족적을 남겼고, 조진만은 대법원장을 지냈다. 한용단을 조직한 곽상훈은 5선 국회의원이 됐다.

 

이밖에도 많은 통학생들이 경제, 문화, 정치, 행정, 교육, 예술 등 인천의 각 분야에서 선도자 역할을 했다. /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