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 명령으로 인천서 군자금 모집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30 10:10:54
상해임시정부 명령으로 인천서 군자금 모집
인천중대사건-열혈청년 윤응념
1923년 5월5일자 동아일보는 인천부내 소사방면에서 중대범 2명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기사는 인천경찰서가 영흥도에서 시국을 표방하고 금품을 강탈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5월1일 두명을 검거 조사중이며, 이 사건이 이외의 방면으로 확대되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경찰은 서울 종로와 동대문 등지에서 추가로 7명을 체포한다.
소위 ‘인천중대사건’, 또는 ‘윤응념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의 연루자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명령으로 인천지역에서 비밀리에 활약하던 군자금 모집책이었다.
3·1 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 들어선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한다. 교통부 산하 교통국은 국내와의 교통통신 및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담당하는 비밀연락조직으로 중국 안둥(安東)에 있는, 무역상을 경영하는 아일랜드 사람 조오지 쇼우의 ‘이륭양행’에 거첨을 두고 활동했다. 1920년 들어서 교통국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이듬해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교통국에서 참사로 있던 윤응념(1896∼?)이 인천중대사건의 핵심인물. 불과 27살인 열혈청년 윤응념은 몇차례 중국과 인천을 오가며 상해임시정부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거나, 국내 주요인사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다.
당시 신문기사는 윤응념의 활약상을 자세히 보도한다.
동아일보가 경찰조사를 바탕으로 5월20일과 재판 현장을 보도한 9월13일자 기사에 따르면, 윤응념은 1917년쯤 중국으로 건너가 영어 공부를 하다,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상하이로 옮겨간다. 이후 김정복의 소개로 임시정부 교통국장 손정도를 만난다. 이때부터 교통국 소속으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윤응념은 우선 국내에 독립신문과 신한청년 등을 배포하는 임무를 맡는다. 1921년 4월경에는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국내에 잠입해, 3개월 뒤 임시정부 비서국장 도인권의 처자와 당시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한다.
1922년 4월 손정도의 명령으로 다시 인천에 숨어든 윤응념은 본격적인 군자금 모집 활동에 들어간다. 윤응념은 인천에 비밀조직을 조직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중대사건에 연루된 이호승(43·1923년 당시 나이), 이동진(25), 윤경중(27), 송중식(35), 최수연(26), 김순창(31), 장수태(45), 김유근(48) 등이 여기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 대부분은 인천부나 인천 인근 섬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인천에서 나고 자란는지 타지에서 흘러들어왔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재판장에서 “윤응념의 권유로 어찌할 수가 없어 그의 군자금 모집에 편의를 주고, 혹은 보조를 하여주고, 혹은 같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고 밝혔다.
윤응념은 이들과 함께 인천 인근에 있는 고도(孤島)를 근거지로 해 영종도를 비롯해 대부도, 장봉도, 시도, 신불도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경찰발표를 근거로한 당시 신문들은 윤응념 등이 ‘육혈포’를 들고, 사람들을 협박해 돈을 강탈했다고 보도한다. 경찰조사에서 윤응념은 독립운동가 이성춘으로부터 받은 권총 2자루와 탄환 200발을 황해도의 한 섬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총을 들고 윤응념이 인천지역 부호들을 찾아가 “권총을 겨누고 돈을 내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였다”고 발표했지만, 윤응념은 재판장에서 이를 완강히 부인한다.
윤응념은 이 자리에서 “조선 민족을 위하여 다만 그들에게 동정을 구하였을 뿐이니,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하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반박했다.
당시 군자금 모집관 관련한 기사들은 ‘강도’나 ‘강탈’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군자금을 모금하던 독립단원들이 실제로 악덕 부호들을 대상으로는 협박하는 방법을 썼을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댄 부호들을 보호하거나 조직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강도행세를 했을수도 있다.
윤응념의 군자금 모집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은 재판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호들은 돈을 내놓지 않거나, 번번히 현금이 없어 돈을 거두지 못했다.
윤응념은 임시정부와 원활히 연락하기 위해 군자금 중 일부(400여원)를 써 배 한척을 구입하기도 했다. 또 개성에서 수삼 200근을 사, 이를 홍삼(61포)으로 만들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재판부는 윤응념에게 12년형과 함께 수삼밀수의 책임을 물어 벌금 300원을 선고했다. 이동진은 징역 10년, 윤경중은 징역 7년, 송중식은 징역 8년, 최수연은 징역 7년, 장수태는 징역 1년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과 함께 검거된 김순창과 김유근에 대한 재판기록이나 보도내용이 없어 이들 2명의 구속·재판 여부에 대해선 확인 할 수 없다.
윤응념은 서울 출생으로, 황해도 재령에서 그리스도교도 독입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형을 살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중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인천에 연고가 없었던 윤응념이 어떻게 인천에 잠입, 여러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개항장인 인천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여러나라의 선박이 오고가는 중요한 항구였다. 중국 상하이간 직항로가 1924년 6월 개설(1924년 5월7일자 동아일보)되기 전에도 인천에서 중국으로 오가던 뱃길은 열려 있었다.
당시 신문에 인천을 통해 들어온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이 간간히 이어지는 이유다. 인천 상하이간 직항로 개설로 인천 경찰이 수상 파출소를 개설하는 등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잠입 수단이 하나 더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천항 주변에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조직이 없었다면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경찰조사결과 윤응념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10명(1923년 5월20일자 동아일보). 그러나 경찰에 붙잡힌 조직원은 9명 뿐이었다. 한 명이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인천 만석동에서 태어난 김원흡(金源洽)이 바로 그다. 인천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신민회에서도 활동했다. 간도지역에서 안창호를 만나 연통제 간부를 지내다 검거, 풀려난 뒤 인천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임시정부 교통국장 손정도의 명령으로 교통국 내지책임집사를 맡는다.
윤응념이 중국을 오가며 여러 임무를 해결할 때 꼭 김원흡이 있었다. /김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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