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항거운동' 전국 확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30 10:12:20
`日 항거운동' 전국 확산
광주학생운동은 광주지역 학생들의 반일·항일의식은 종종 같은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로 분출됐다.
1929년 10월30일 오후 5시30분경 지배자의 입장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대해오던 일본인 광주중학교생들이 같은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들을 ‘센징(鮮人)’이라 부르며 머리를 잡아채는 등 희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광주고보 남학생이 일본인 학생과 싸움을 벌였고, 다음날 이 싸움은 한·일 학생간 패싸움으로 번졌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 남학생들만 힐난했다. 광주일보 일본인 기자는 이 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했다.
반일감정이 극에 달한 학생들은 11월3일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광주고보를 비롯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제작을 방해하기도 했다. 광주역 광장에서 한·일 학생간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시위로 광주시내 각급 학교는 3일간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사태가 악화돼 11월9일까지 휴교를 연장했다.
이로 인해 구속된 조선인 학생은 70여명. 그러나 시위는 11월12일에도 벌어졌고, 20일전후에 또 계획하다 무산됐다.
일제는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한반도 전역의 청년학생을 일제히 일어나게했다.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에서 5만4천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이 중 퇴학처분 582명, 무기정학 2천330명, 피검자 1천462명이었다. /김주희기자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상고 학생들의 항일투쟁기(하) (0) | 2023.03.16 |
---|---|
인천상고학생들의 항일투쟁기(상) (0) | 2023.03.16 |
김원흡, 한평생 항일운동에 몸담아 (0) | 2023.03.16 |
상해임시정부 명령으로 인천서 군자금 모집 (0) | 2023.03.16 |
청년운동-전문예술활동 (1) | 2023.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