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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김원흡, 한평생 항일운동에 몸담아

by 형과니 2023. 3. 16.

김원흡, 한평생 항일운동에 몸담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30 10:11:35


김원흡, 한평생 항일운동에 몸담아
인천중대사건 피해 북간도로 탈출 24년만에 귀국

 ‘혁명투사 김원흡씨 귀국’
 해방과 함께 인천에서 창간한 대중일보는 1947년3월1일자 신문에 24년간 조국을 떠나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한 김원흡(67·1947년 당시 나이)씨의 귀국소식을 대서특필한다.


 돌아온 투사 김원흡은 1923년 5월 인천지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경찰에 발각된 ‘윤응념 사건’(또는 인천중대사건)의 비밀조직원 중 유일하게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한 인물이다. 윤응념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등 민족인사를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김원흡은 인천항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조직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정작 그에 대한 기록은 당시 신문기사 이외에는 찾을 수 없다.


 대중일보에 난 ‘김원흡 귀국’ 기사를 바탕으로 그의 흔적을 밝히며, 앞으로의 과제로 삼는다.
 
 1923년 5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북간도로 탈출한 김원흡이 고향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인천을 탈출한 뒤 북간도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던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땐 일본 경찰이 아닌 좌익의 수청공작대를 피해야했다. 차디찬 두만강을 다시 건넜고, 탈출할 때는 없었던 38선을 몰래 넘어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 다리를 이끌고 고향에 돌아와 옛 동지를 만났다. 누구보다 그를 반긴 것은 그의 가족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김원흡은 인천 만석동에 본적을 두고 있다. 귀국 당시 그의 나이가 67세이므로 188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기 김원흡은 당시 제물포교회(내리교회)가 운영하던 국내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영화학교는 1892년 3월12일 영화학당으로 출발, 1897년에는 여학교를 별도로 설치했다. 정식 학교로 인가받은 때는 1903년이며, 1905년 5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반적으로 영화학교라 하면 남학교를 지칭한다. 그가 교편을 잡은 곳은 지금은 없는 영화남학교일 가능성이 크다. 김원흡은 영화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학당 출신자 중 일부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청년기 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안창호, 윤치호, 장지연, 신채호 등 독립협회 출신자들이 1907년 4월 만든 항일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한다. 기사는 김원흡이 서부인천지구 대표로 3년간 지하활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당시 신민회는 교육구국운동과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독립군 양성운동 등을 벌였다.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회 사건으로 비밀 조직이 드러나, 결국 조직이 무너진다.


 김원흡은 105인 사건 전후에 만주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황을 ‘두만강 북쪽 서리찬 만주벌판을 찾아’라 표현한 것을 보면, 그의 이동 시기는 겨울이었을 것이다.


 만주에서 그는 여러 단체를 전전하다, 1919년(39세) 한반도 최북단 지역인 청진에 머물게 된다. 그 곳에서 당시 임시정부 내무부장인 안창호과 선이 닿는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는데, 이때 ‘함북통감(咸北統監)에 당선’돼 비밀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연통제 각급 행정조직의 책임자로 서울에는 총판(總辦), 각 도에는 독판(督辦), 부와 군에는 부장(府長)과 군장(郡長),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도록 했지만, ‘통감(統監)’이란 직함이 없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오기이거나, 김원흡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통제 간부로 활동하던 중 김원흡은 3·1운동 ‘당시 시베리아에 밀송한 비밀문서 탄로로 체포’된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김원흡은 이 시기 인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비밀조직 활동은 인천에서도 이어진다.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 손정도는 그를 ‘내지책임집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 시기(1920년 전후) 연통제와 또다른 임시정부 비밀조직인 교통국은 잇따라 조직원이 발각되면서 붕괴위기를 맞는다.


 김원흡은 일단 ‘덕적문전도(德積文田島)에 학교를 설치’해 활동기반을 마련한다. 이 때 비밀조직을 구성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윤응념 사건 연루자들이 인천 인근 섬지역에 주거지를 둔 점으로 미뤄 어떤 형태로든 비밀조직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김원흡은 1921년 4월경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윤응념을 도와,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한다.


 김원흡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성에서 수삼을 밀수, 기술자를 데려와 홍삼을 대대적으로 제조해 멀리 상해로 밀매’했다. 이는 윤응념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군자금 모금 혐의로 붙잡힌 윤응념은 ‘수삼 밀수’ 혐의로 벌금형(300원)을 받는다.


 김원흡은 ‘윤응념 사건’을 주도하거나 핵심인물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기사에서 “군자금 모집과 무기 밀수 등 비밀투쟁을 했다”고 밝혔다.


 1923년 5월초 시흥에서 두명의 조직원이 경찰에 붙잡힌다. 인근 오류동에 있던 김원흡은 그 길로 탈출을 모색한다.
 기사는 당시 탈출 루트를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윤응념 사건이 발각되자 선생은 오류동 모처에서 밤을 타서 경인철도를 도보로 다름질쳐 주안염전을 가로질러 자택(만석동으로 추정)에서 다시 필목장사로 변장하고, 군산으로 왔을 때 윤씨 사건을 신문지상을 통해 알게됐다. 선생은 일이 이미 인천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목포에서 1주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이틀만에 다시 현해탄을 거쳐 부산에(하략)”


 그 길로 김원흡은 만주로 향한다. 46일만에 간도성 연길에 도착한 김원흡은 그러나, 여비 160원을 ‘스리’(소매치기)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이후 독립운동의 아지트인 ‘명동중학교’(윤동주, 나운규 등 배출)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 연길에서 항일활동을 벌인다. 만주사변이 나면서 몸을 피해 떠돌아 다니게 된다. ‘다섯번이나 이름을 바꿨’는데 이기창(李其昌)이라 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한민회(韓民會) 간부로 활동하며 한민일보(韓民日報)를 발행하지만, 소련군의 폐쇄령으로 3일만에 문을 닫’는다. 좌익의 수청공작대를 피해, ‘만주사변의 희생자 오준승의 딸이 도움으로 ‘도문’을 탈출’ 1947년 2월1일 고향에 돌아온다.


 그의 나이 67세. 평생을 항일운동에 몸바쳐온 애국지사 김원흡은 24년을 떠돌다 ‘이순’을 앞둔 나이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옛 동지 김대련(金大鍊·당시 경동 대정여관 주인)의 집에서 부자상봉의 감격을 맞았다. /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