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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청년운동-전문예술활동

by 형과니 2023. 3. 16.

청년운동-전문예술활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30 10:09:34

 

울분에 찬 민족의 마음 연극에 담아

청년운동-전문예술활동

 

 

1924419일자 동아일보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인천 청년극단이란 단체가 인천에 있는 한 공연장에서 삼인학우란 연극제목으로 공연으로 벌이다 집어치워라며 소동을 벌인 성난 관객들로 인해 공연 중간에 막을 내리고 줄행랑쳤다는 기사다. 관객들의 소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사는 살풍경이란 표현까지 썼다.

 

이는 하루 전 제물포 청년회가 인천에서 연 연예음악대회가 대성황을 이루자 이에 편승한 무리들이 인천청년극단이란 이름을 팔아 인천 권번에 속한 기생 몇 명을 데리고 공연을 벌이려다 망신을 당한 사건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에서는 사회운동과 함께 다양한 문화활동이 벌어진다.

 

이 시기 생겨난 청년·종교·사회 운동단체들은 민족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웅변대회나, 시국강연회 등을 열었다. 이들은 극단적 빈부격차가 불러온 민족의 생존권 위기를 극복하려고 사상적 대동단결을 외치고, 시대의 요구에 맞는 청년들의 자세를 촉구했다. 민족의 울분을 성토하는 자리가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시대상은 유행하던 동요(1923121일자 동아일보)에 잘 나타난다. ‘인천부사 십년에/못지 떡 한 개를 못 먹고라고 시작한 동요는 인천이라 제물포/살기는 좋아도/ㅅ각가(일본인) 등살에 나 못살겠구나라며 인천에 살고 있는 일본인과 한국인 간에 나타난 극단적인 명암을 표현하고 있다.

 

인천에서 활동한 청년·사회 운동단체들은 다양한 문화활동을 통해, 울분에 찬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들이 벌인 각종 공연은 연일 만원사례를 치렀으니, 사기극이 벌어질만도 했다.

 

경인선통학생친목회나, 내리교회 청년단체인 웹웟 남·녀 청년회, 인천한용단, 제물포 청년회 등이 각종 공연을 벌이고, 습작수준의 문학지를 내기도 했다. 이우구락부처럼 우리 전통 국악을 발굴·보존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전문적인 문화·예술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경인선 통학생 중 한명인 고일씨는 인천석금에서 인천지역 문화운동사에 대해 회고하며 경인선통학생친목회의 문예부가 인천 문화운동사의 첫 페이지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통학생 친목회 문예부에는 고일과 정노풍, 고유섭, 이상태, 진종혁(진우촌), 임영균, 조진만 등이 활동했다. 고일 선생은 운동경기(한용단)을 외피(外皮)로 한 그 핵심은 민족해방정신을 내포(內包)한 문학운동을 전개했다고 회고한다. 문예부 회원들은 이런 정신을 담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습작수준의 작품이나마 등사판 간행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것이 바로 인천지역 연극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칠면구락부. 칠면구락부에는 고일을 비롯한, 극작가로 정식 등단한 진우촌(경성 토월회), 그리고 정암과 원우전 등 전문 연극인까지 가세했다.

 

당시 유행하던 연극 형태는 소인극’. 3·1운동 이후부터 20년대 중반까지 아마추어 연극운동 양식으로, 학생층과 청년층이 풍속개량이나 사회개선, 기아구제 같은 주제를 순수한 열정으로 거칠게 담아낸 극 양식이다.

 

인천지역에서도 소인극이 많이 열렸다. 1924716일 인천노동총동맹이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다 당국의 불허로 공연이 중지된 적이 있고, 같은 해 8월에는 개성 소녀가극단이 수제구제를 위한 소인극 공연을 인천에서 벌인 기사가 또 있다.

 

기근 구제를 위한 공연도 192511일 강화중앙청년회 주최로, 이어 39일에는 조선 기근 인천지회 주최로 펼쳐 대성황을 이뤘다.

 

칠면구락부 또한 소인극 활동을 벌였다는 신문기사(1928625일자 매일신보)가 있지만 다른 성격의 문예운동을 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 칠면구락부 출신으로 진우촌과 한형택, 김도인 등이 1927년 발간된 순문예지 습작지대에 참여한 문학인다. ‘습작지대에는 이외에도 엄홍섭, 박아지, 염근수, 유도순 등이 가담했다. 타블로이드판 월간 문예지로 진우촌이 편집임 겸 발행인을 맡고, 한형택이 재정을 담당했다.

 

문학단체로는 1925121일 결성된 인천유성회도 있다. 이차도, 진종만, 박형재, 이주영을 비롯해 12명이 참여한 이 단체는 민중예술을 본위로하고 프로문학을 발전시킬 것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다. 유성회 주최의 음악대회가 열리기도 했다(192622일자 조선일보). 유성회는 19258월 결성된 카프(KAPF)의 영향을 받아 조직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문예활동보다는 연구토론을 중심으로 한 동아리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4월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이우구락부는 인천지역 최초의 음악단체로, 조선 정악을 보존하고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년 이상의 지역 유지나, 상공인, 미두 사업자 등으로 구성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전문 예술단체라 하기 보다는 동호인이나, 문화후원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현 고유섭의 부친인 고주연이 이 단체 학습부장을 맡았고, 장인 이흥선도 후원자로 있었다. 고유섭 일가가 인천지역 문화운동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의 숙부인 고주철은 해방 후 인천에서 대중일보를 창간했다.

 

고유섭과 함께 인천이 낳은 큰 예술가로는 함세덕이 있다. 인천지역 연극 침체기인 1930년대 활동한 극작가 함세덕은 한국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출신으로, ‘만포진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시로 등단해 연극 극작가로 활동하다 1940년대 들어서는 친일연극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연극동맹에 가입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당시 서른다섯의 나이로 폭사하고 만다.

 

1920년대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인천지역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이 전개됐다. 설립연도는 정확히 않지만 1920년 전후 세워진 협률사(축항사라 했다가 지금의 애관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에서 활발한 공연이 펼쳐진다. 인천지역 단체들의 공연 외에도 서울에서 활동하던 혁신단이나, 취성좌, 신극좌, 민중극단, 토월회, 신무대 등 많은 단체들이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각종 공연장도 이 시기에 생겨나는데, 극장끼리 반목하는 사태까지 빚어질 정도였다 하니, 공연예술활동이 얼마나 왕성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왕성한 활동은 일본 경찰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다. 각종 공연이 중단되거나 취소되는가 하면, 잡지나 문학지는 사전검열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김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