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답동성당 주변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9-28 05:21:53
지난88년 발간한 천주교 인천교구사 제2집의 사진 한장이 눈길을 끈다. 곧 마라발 신부집 주변도면이다. 주석은 1895년 ‘마라발 신부의 피격사건’의 일본경찰 조서에 첨부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라발 사건이란 그해의 첫날이던 1월1일 까닭없이 외국인 신부를 구타하는 등 일본인이 저지른 행패를 말한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그날 오전 11시경 한국인 소년들이 성당 문앞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일본인들이 연을 빼앗는 등 훼방했으며 마침 신부에게 발견되자 그들은 달아났다. 그러나 일본인이 그들 경찰과 집단으로 나타나 한국인 소년들을 때리고 이를 말리던 마라발 신부를 구타, 수염을 잡아뽑고 옷을 찢으며 발로 찼다. 그리고 계속 성당 마당으로 들어와 신부방에 뛰어들고 기물을 파괴하는가하면 수녀의 가슴을 치는 등 난동했는데도 뒤늦게 나타난 한국 경찰은 한국인 소년을 연행할뿐 속수무책이었다.
보고를 접한 뮈텔 주교가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영사는 다시는 일본인 난동이 없도록 사제관에 들어가지 못하게 경고판을 붙이고 경비병을 상주시키겠다고 회신했다. 경찰관에게는 벌금으로 급여를 몰수하고 노역과 20일간의 감금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후로도 일본인의 행패는 계속되었다.
지도를 다시 보자. 한자와 영문을 병기한 도면은 일본인이 작성한 듯 필체가 능숙하나 글씨가 작아 판독하기 어렵다. 원문서의 규격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앙 상부에 교당(敎堂)과 목사가(牧師家)라는 표시가 보이고 교당 좌측 아래로 교당묘지와 사건이 있었던 도로 아래로 일본분묘지(墳墓地)라 쓰여있다. 그리고 분묘지 밑에 3동의 군대창고, 그 우측으로 군대의원(醫院)을 표시하고 하단 큰길가에 일본화원(花園)이라 표기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어느 위치인지 분별이 가능치 않아 안타깝다. 전문가의 분석이 있으면 당시의 답동성당 주변 형편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할수 있겠다.
인천시 중구가 120여년의 천주교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답동성당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