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여름 계산동은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10-09-28 05:22:45
1945년 여름은 참으로 급박했다. 열한살 어린 것의 눈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작에 하늘 높이 비행운을 그리는 B-29 공습이 잦더니 학교앞 도원동 작은 공장을 소련 비행기가 폭격했다. 교실에는 빈자리가 점점 많아졌다. 시골에 친척이 있는 어린이들을 소개시키더니 갈 곳 없는 어린이들은 모아 아예 학교가 단체로 피란을 갔다. 창영학교는 여주군 어느 지역으로 갔다고 했다.
4학년의 전망차자는 부평읍내라던 지금의 계산동 외가집으로 갔었다. 그해 8월13일이던가 김포비행장 상공에서 미·일 공군기들이 공중전을 벌였다. 외사촌과 방공호에 피하여 내다보이는 출입구로 일본기가 쫓기는 것을 보고 씁쓸했었다. 일본이 세계 최강이요, 전쟁에서 이긴다고 배워온 터였으니 말이다.
이틀후 8월15일 저녁이었다. 사람들이 아랫마을에서 태극기를 들고 몰려들었다. 윗마을 일본인 ‘만치’의 양조장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마당앞에 모인 사람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불렀다. 평소 같으면 얼씬도 못할 장소에서였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불도 켜지지 않아 캄캄했었다. 잠시후 농악대 조차 합세하여 소란은 가중되었다. 그날 낮 정오에 일본의 항복 방송이 있었다고 하는데 시골에서는 늦은 저녁에야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그렇게 설렘과 흥분의 밤은 지나고 어떻게 마련했는지 집집 대문에 태극기가 걸렸었다. ‘고양굴’ 향교문에 그려져있던 태극이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라고 했다. 일본이 ‘고오상’을 했다니. 그리고 일본이 우리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는 별도로 있었다니. 그때는 항복을 일본어로 ‘고오상(降參-항참)’이라고 했었다.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패한다고 배워온 어린 것들로는 그것이 충격일 수는 있어도 해방의 기쁨이 어떤것인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철부지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65년-아직도 한일간의 현안은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위안부니 독도니 문화재반환이니의 문제는 산적해 있다.
어제 광복절을 맞아 계산동 청년회의 나라사랑 축구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계산동 청년회는 해방 이듬해부터 해마다 축구대회를 열어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