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보는 인천 역사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10-10-12 00:00:25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姜玉葉
Ⅰ. 인천 역사 이해의 전제
1. 인천 역사 정립의 필요성과 과제
가. 인천의 정체성 확립과 미래발전의 지표는 역사문화인식이 관건
나. 국사와 지역사
다. 근대사 속에 남아있는 식민잔재와 근대문화
라. 지역개발과 문화유산의 보존 문제
2. 인천의 문화유산(2010.8월 기준)
가. 지정문화재 230기(국가 62/시 163기+등록문화재 5기)
- 강화 106기(국가 30/ 시 76기)
- 고대(19)/고려(33)/조선(93)/근대(37)=총 182기(식물 4기 제외)
※천연기념물(13), 명승(1) 및 무형문화재(30) 등 44기 제외
- 생활(73, 묘지33, 의학9)/관방(50)/종교(53)/교육7/기타(3)
나. 강화의 문화유산
- 고대(10)+고려(25)+조선(49)+근대(12)=총 96기
※천연기념물(5), 무형문화재(4), 식물(1) 등 10기 제외
- 관방(35)+종교(35)+생활(24, 묘지19기+ 주택3기+기타2기)+교육(2)
다. 근대문화유산: 37기(사적2/유형19/기념물2/민속자료1/문화재자료8+등록문화재5)
- 개항장: 22기(사적1/유형문화재10/기념물4/민속자료1/문화재자료2+등록문화재4)
중 20기. 이외에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근대건축물과 근대사의 중요한 현장으
로서 무형의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하는 교육장.
- 등록문화재(5):중구청,일본우선주식회사,공화춘,수준원점,제물포고교 강당
- 동구의 문화재 : 6기(근대/유형3/기념물1/문화재자료2)
3. 인천의 문화재 총괄표(2010. 8월 기준)
Ⅱ. 인천 문화유산의 역사적 성격
1. 개국과 왕도의 고장
가. 미추홀(彌鄒忽)과 비류백제(沸流百濟)
백제의 건국설화 온조설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형제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온조는 한강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비류는 미추홀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비류설에는 비류가 어머니(소서노)와 온조 등 일행을 거느리고 미추홀로 와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 후 장수왕 63년(475) 한강유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이곳에 매소홀현을 두게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 건국신화와 비류전승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서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비류이고 차자는 온조이다. 우태가 죽고, 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결혼하였는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유리(孺留)가 오자 이를 세워 태자를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게 되었다.”(『삼국사기』권 23, 백제본기 1, 백제시조 온조왕 즉위년조)
나. 7대어향
고려 시대 인주 이씨(李氏)는 문종(文宗)에서 인종(仁宗)에 이르는 7대 80여년(1047~1126)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왕실의 왕자․궁주 가운데 인주 이씨의 외손 또는 생질(甥姪)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었기 때문에 경원(慶源)이라 하였고 또 ‘7대어향(七代御鄕)’이라고도 하였다.
다. 강도시대(江都時代)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목적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은 고종 18년(1231)의 일이며 이후 고종 46년(1259)까지 총 6차에 걸쳐 약 30년의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제1차 침공이후 물러났던 몽골군이 재차 침공하려 할 즈음 고려 조정은 수도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전시(戰時)의 새로운 도읍지로 산간 내륙 지방이 아닌 섬 강화도가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최우의 의도였다. 즉, 제1차 여․몽전쟁이 지속되고 있던 고종 18년(1231) 12월에 최우는 승천부(昇天府)의 부사(副使) 윤린(尹璘)과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로 하여금 피난지로서의 강화도의 적합성 여부를 살펴 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해도입보(海島入保)?를 최적의 방책으로 고종 19년(1232) 7월(음력)에 강화도로 입도한 이래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기까지 고려는 39년간(1232~1270년)의 ‘강도시대(江都時代)?를 열게 된다. 강화로 천도한 이후 궁궐과 관해시설 및 강도(江都)를 둘러싼 성곽(城郭)을 축조하였다.
2. 해상교류의 중심지
가. 대(對)중국 해상교류의 효시 : 능허대(凌虛臺)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남조(南朝)의 동진(東晉)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近肖古王 27年,372)부터 수도인 한성을 웅진(熊津)으로 옮긴 개로왕(蓋鹵王 21년,475)까지 100여년 동안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하던 곳이다. 당시 삼국의 정치형세는 백제가 고구려․신라와 대치관계에 놓여 있었고,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힌 백제는 부득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과 통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해상교통로가 등주항로(登州航路)이다. 등주항로란 한강 하류인 인천의 능허대에서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에 이르는 항로이다.
능허대는 연수구 옥련동 해안의 청량산 자락이 송도쪽에서 서북쪽 방면으로 길게 뻗은 반도형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구릉 끝의 오뚝한 봉우리가 능허대이고 능허대 동쪽 아래 쪽의 포구가 대진(大津)이다.
나. 중국사신 접대의 영빈관 : 경원정(慶源亭)
중국의 송(960~1125)은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연로에 고려관(高麗館)이라는 객관(客館)을 세우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하였는데, 고려에서도 중국의 송 사신과 상인이 통과하는 항로상에 객관을 설치하여 내왕하는 그들을 극진히 대우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宋使 徐兢 ; 1123)에 의하면, 흑산도에는 관사(館舍), 군산도에는 군산정(群山亭), 마도(馬島)에는 안흥정(安興亭), 자연도(紫燕島)에는 경원정(慶源亭), 예성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자연도는 인천의 속도로서 지금의 영종도이며 현재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자연도라는 명칭은 경원정 동쪽에 많은 제비가 날아다녔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3. 사상과 정신수양의 생성지
가. 강화도와 팔만대장경 조성
※ 선원사(禪源寺)는 고종 32년(1245) 최이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어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사찰로 전하고 있다. 당시에는 순천에 있는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히던 매우 큰 절이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전란을 피해 이 곳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선원사가 팔만대장경을 조판한 곳이라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의 판각 작업을 실제 주도한 인물이 최이였고 선원사는 바로 최이의 원찰이었던 점, 그리고 대장경의 교정․보수 및 정사(淨寫), 판각이 주로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충선왕 후 원년(1309)에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쌀 300섬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 이밖에 조선 태조(太祖) 7년(1398)에 서울로 옮기기 직전 팔만대장경이 선원사에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선원사 경내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강화학파
조선후기에 강화도에서 출발하여 형성된 학파로 정제두(鄭齊斗), 이긍익(李肯翊), 이건창(李建昌),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등은 19세기말 20세기 초 학문적 실천을 통해 독립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다. 신․구 기독교 포교지
아펜젤러(Appenzeller) 일행은 선교 임무를 띠고 고종 22년(1885) 인천항 제물포구에 정박했다. 때마침 그 해 4月 5日이 부활절인지라 첫 선상예배를 올렸다고 전해짐. 아펜젤러는 인천에 한국 감리교 최초의 예배당을 건축. 예배당은 1891년 11월에 완공되었는데 겉에는 석회를 발랐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 방은 두 개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는 아주 단순하게 꾸며 설교단만 있었다. 이 집이 한국에서 최초로 지은 감리교 예배당이란 기념비적인 의미
※ 한편, 고종 26년(1889) ‘파리외방교회’ 소속 홍요셉(Joseph) 신부가 초대 인천 천주교성당 신부로 답동 언덕에 성당 터를 마련하고 부임해 왔다. 이어 다음해인 1890년 9월, 영국 국교인 성공회는 고요한 주교(Bishop. J. Corfe)에 의해 한국 최초로 송학동에 성공회 ‘聖 미카엘 Michael 교회’ 를 설립하였다.
4. 구국의 성지, 보장처
가.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 강화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인천지역사회가 강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육․해군의 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하였다. 12진보(鎭堡) 53돈대(墩臺)의 설치, 강화(江華)의 내․외성과 문수산성(文殊山城)의 축조가 그것이다. 그리고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 때부터 추진되었던 강화도의 갯벌 매립사업이 한층 확장되어 오늘날의 강화평야를 이룩하는 지형적 변화가 있었다.
특히, 강화는 한국역사의 축소판이다. 국조 단군(檀君)의 유향이 서린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과 곳곳에 선현들의 문화유산이 460여개가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선사시대인의 유적인 강화 지석묘군(세계문화유산, 2000)을 비롯하여, 고려 후기 몽골(元)과의 항쟁 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팔만대장경(세계문화유산)을 조판하던 곳이기도 하다(선원사지 ; 사적 제259호). 그러므로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한국의 역사보고이다.
나. 구국(救國)의 성지(聖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해 오기 시작하자, 이들 인천지역의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 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 기능하게 되었다. 서양세력 대부분이 서해안지역, 그 중에서도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인 인천해안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은 끝내 인천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가 그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경우와는 달리, 프랑스와 미국은 이 충돌에서 조선의 집요하고도 처절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그들은 모두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약탈로 만족하며 퇴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지역은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500여년 만에 다시 한번 조국수호의 성지로 부각되었다. 아울러 인천개항 교섭의 진행과 함께, 화도진(花島鎭)과 연희진(連喜鎭)을 신설하고 다수의 포대를 관할토록 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5. 근대문화의 선구지 : 개항과 근대문화의 수용
가. 인천의 개항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6)을 체결한 이후 일본의 집요한 인천개항 요구는 마침내 관철되었다(1883). 인천의 개항문제가 제기된 것은 1879년 4월이었는데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된 지 3년 2개월, 원산개항이 허용되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정부의 자주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강요된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당초부터 조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성의가 없었다. 일본 역시 처음부터 인천을 개항지로 염두에 두고 조선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조선은 원산항 개항을 인정하는 대신 인천의 개항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강경한 거부자세로 일관하였다. 인천은 수도에 아주 가까운 해안의 요충으로 보장중지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 제물포(濟物浦)가 개항되자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들도 속속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제물포에는 인천해관(海關; 1883)과 인천감리서(監理署; 1883)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 1884)가 들어섰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어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지역사회가 국제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 개항은 한국 역사에 있어서 근대화라는 발전적 요인으로 평가되었지만, 타율적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의 희생을 담보로 조성되었음을 인식.
나. 근대문화의 수용, 선구지 역할, 최고 최초의 문화들이 생겨남.
인천해관 설치(1883), 구미 각국 상사(商社)의 개설(1883), 서양식 건축 양관(1883), 외국인 묘지(1883), 각국공동조계 경영(1884), 우정국 인천분국 설치(1884), 신․구 기독교 포교지(1885,1889,1890), 각국공원 획정(1888), 대불호텔(1888), 근대식 주화주조와 인천전환국(仁川典圜局) 설치(1892), 경인철도부설(1899), 하와이 이민선출항(1902), 팔미도 등대(1903), 인천기상관측소 설치(1904), 천일염전(1907), 유일의 갑문항(閘門港,1918) 등
다. 근대시설의 유입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 일본의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 경인도로 확장(1883. 재확장 1914), 인천·용산간 해룡호 취항(漕運 목적), 초기의 항만시설, 제물포 돌제(1883~1884), 경인철도 부설(1899), 항만의 확장·수축 착수(1906~1918, 1930년 말)
라. 국제도시로의 변모 : 일본조계, 청국조계, 각국조계→열강의 각축장
개항과 동시에 각 개항장에는 외국인 거류지, 혹은 조계라고 불리는 구역이 설정되었다. 1883년 일본조계가 최초로 설정되었고 이후 청국조계와 각국조계가 형성되었다. 일본조계는 현재 자유공원 남쪽의 관동, 중앙동일대 1만여 평의 면적이었고, 청국조계는 선린동 일대 5천여 평의 면적이었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주로 서구인들이 거주하려 했던 각국조계는 청국조계와 일본조계를 감싸 안은 모습으로 14만평에 달했다.
마. 상공업도시, 산업도시로 변모
한․청․일상인의 경쟁, 외국상사진출. 염전, 인천항을 통한 미곡수출, 정미업 발달.
바. 일제강점기 인천의 변화
(1) 행정구역의 개편 : 하부 행정조직이 모두 일본식 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뀜.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크게 축소, 나머지 농․어촌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
(2) 식량공급지로의 개편 :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1923) 등을 추진.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
(3) 병참기지로 전락 : 1929년의 세계적 대공황은 일본-조선의 경제 블록화를 초래. 일제는 그 활로를 찾기 위해 대륙침략을 감행. 본국을 전시체제로, 조선은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 1936, 1940년에는 부천군에 편입시켰던 일부를 다시 인천부에 편입하여 주거지 및 식량공급지화. 경인공업지대조성.
Ⅲ.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 -향후 과제-
○ 2010년 중구 개항장일대(537,114㎡, 162,762평)를 문화지구로 지정. 근대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 가능. 근대역사교육의 체험학습장+이국적 도시문화 재생+영상작품무대 = 관광자원/미래의 자원
○ 구도심개발과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존 상존 → 산업문화유산의 활용,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재탄생, 근대건축물 재활용 등
○ 개발과 보존의 조화,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인식 제고, 관심과 애정, 자긍심 필요(문화운동), 자료 발굴, 수집, 정리 등 연구의 체계적 지원 필요.
○ 특히, 근대문물의 선구지 역할(개항장)을 함으로써 타 시도와 다른 이국적 정취 간직.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기억해야 함.
○ 인천의 지향점과 발전방향 → 경제발전에 따른 도시의 정체성 정립을 뒷받침해 줄 "역사가 흐르는 문화도시 인천" 구현.
출처 : 해반문화사랑회 주최 2010년 골목문화해설사 교육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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