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생당(濟生堂)
제생당(濟生堂)은 1903년(광무 7) 인천 축현리(현재의 인현동)에서 개업한 약방이었다. 창업자는 훗날 고려약제사회(高麗藥劑師會會長)회장을 역임하기도한 이경봉(李庚鳳)으로, 그는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생당을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39년에는 학교위생강화를 명분으로 출마하여 경성부회(京城府會) 의원으로 친일활동을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제생당에서는‘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이란소화제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 소화제가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제생당은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약방이 되었다. 개항기에 알렌등 서양의학을 토대로 조선인을 진료한 의료진들이 한결같이 소화불량을 조선인의 대표적 질환으로 꼽을 정도로 소화제의 수요는 광범위하게 내재해 있었다. 때문에 이 소화제는 그 효능과 각종신문에 게재된 광고덕에 인천뿐만 아니라 서울등에서도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청심보명단은 효능과 인기가 대단하여 경쟁관계에 있던 자혜약방에서‘청신보명단’ 이란 유사품을 제조·판매하여 분쟁을 빚을 정도였다. 훗날‘매약계(賣藥界)의 원조(元朝)’로 세간에 칭해질 정도로 유명해진 제생당은 청심보명단의 매출에 힘입어 서울에도 점포를 개설하고 계속 사세를 확장하였다.
남문 안에 있던 제생당의 서울본점은 약업(藥業)의 부진(不振)을 연구(硏究) 하며 약가(藥價)의 균일(均一)을 도모(圖謀) 코자 1907년 장기무, 이경봉 등이 주도한 대한약업총합소(大韓藥業總合所) 가 결성된 곳이기도 하다.
제생당의 위치에 대해서는 축현리에서 창업하였다는 신문기사 외에는 그 위치를 추정할만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제생당을‘매약계의 원조’ 반열에 올려놓은 ‘청심보명단’ 의 대중적인기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머니: 복히야 그 꽃을 왜 따느냐?
딸: 어머니 이 꽃에 항취가 대단해요.
어머니: 그럼 그 보다 더 향기로운 것을 사주랴.
딸: 그것이 무엇이야요. 그런 것을 사주셔요.
어머니: 청심보명단이란다. 가서 사줏게 이러나거라.
출처 : 인천 중구사
https://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2060728365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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