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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인천 역사의 퍼즐, 문화유산

by 형과니 2023. 6. 15.

인천 역사의 퍼즐, 문화유산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11-22 22:42:15

 

인천의 미래는 현재의 발전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쌓아 온 오랜 역사적 경험을 내재적 구성내용으로 펼쳐질 것이다. 과거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보자면 인천지역 여기저기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찾아 퍼즐 맞추듯 연결해 봐야 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시조 단군의 유향이 서려있는 마니산의 참성단, 남한 유일의 고려시대 왕능인 고종과 희종의 능,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고인돌군, 전등사, 성공회성당, 답동성당 등의 종교유적과 광성보, 초지진 등 관방유적, 개항장의 근대문화유산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아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려는 이 시대 우리들의 역사인식일 것이다. 글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역사를 복원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실증(實證)과 전거(典據)를 염두해 둔다면 유물·유적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인천이 지닌 문화유산의 경중을 숫자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써 계량화해 본다면 20107월 현재 지정·등록된 인천의 문화재는 총 230기이다. 이들 중 참성단, 강화지석묘, 답동성당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62, 인천도호부청사, 팔미도 등대 등 시 지정문화재가 163기이며 공화춘 등 등록문화재가 5기이다.

 

이들을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식물과 천연기념물, 명승과 무형문화재 등 48기를 제외한 총 182기 중 선사 및 고대가 19, 고려가 33, 조선 93, 근대가 37기로 조선시대 문화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보면 묘지를 포함한 생활사 관련 문화재가 가장 많고(64), 돈대 등 관방유적(50)과 사찰 등 종교유적(53)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강화의 문화유산은 시 지정문화재가 총 106기로 이들 중 식물, 무형문화재 등을 뺀 96기 가운데 역시 조선시대 문화재(49)의 비중이 높고 고대가 10, 고려시대가 25, 근대가 12기로 나타나고 있다. 유형별로는 관방(35)과 종교(35) 및 생활유적(24), 교육(2)순으로 구분된다.

 

인천은 근대 개항과 근대문화의 수용에서 중요한 공간적 역할을 했던 곳이지만, 전체 문화재 중 근대문화재가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그것은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수많은 사건과 전쟁을 겪었던 가장 중심 지역이었기 때문에 멸실되고 흔적만 남은 탓이기도 하다. 전체 37기 중에 중구에 20, 강화에 12기가 집중되어 있다. 등록문화재의 경우만 중구 개항장에 4기가 있다. 그러나 중구의 경우는 현재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되어 있는 다수의 근대건축물이 아직 남아있고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서 무형의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하는 역사교육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천 문화유산의 퍼즐을 맞춰 인천의 역사적 특성을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인천은 새롭게 나라를 열고 왕의 도읍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국조 단군(檀君)의 유향이 서려있는 남한유일의 문화유산인 참성단과 삼랑성이 있고, 미추홀은 비류백제의 수도이자 출발지였으며, 문학산성은 그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인주이씨 왕비의 탄생은 7대에 걸쳐 80년간 왕실의 외척으로써 기반을 다져 ‘7대 어향(御鄕)’으로 알려졌으며, 고려 후기 강화도는 개경을 대신한 제2의 수도로서 40년간 항몽(抗蒙)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둘째, 인천은 해상교류의 중심지로써 기능하였다. 제물포 개항 이전 삼국시대에 이미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통해 최초로 중국과 교류했던 능허대는 바로 그 흔적이라 할 것이다. 고려후기 우리나라 최초로 교동향교에 공자상을 봉안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더구나 인천 개항은 부산, 원산과는 달리 서울과 가까워 개항에 따른 실제적인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중구개항장에는 근대문화 이입에 따른 우리나라 최초의 이야기와 근대문화유산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셋째, 인천은 정신과 사상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사찰과 향교는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강화도에서 판각한 팔만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려 했던 상징적 산물이었다. 조선후기 강화를 중심으로 생성된 강화학파 역시 정제두, 이건창, 정인보로 연결되면서 학문적 실천을 통해 독립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정신력의 결집이었다. 개항 후 최초의 감리교 내리교회가 세워지고, 성공회성당이 건립되었던 것은 근대의 전환기를 살아갔던 인천인들의 정신과 사상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넷째, 인천은 국가적 위기에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공간이기도 했다. 강화에 설치된 초지진과 광성보 등 진보(鎭堡)와 갑곶, 용두돈 등 돈대(墩臺)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응하여 나라를 수호했고, 화도진, 연희진, 논현포대 등은 근대 개항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흔적이다. 6·25전쟁에서 인천이 수행했던 역할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다섯째,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근대문화의 선구지(先驅地) 역할을 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개항장에는 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그들만의 거류지가 생겨났고, 일본·청국·각국공동조계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국제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해관, 외국인 상사, 서구식 주택, 공원, 호텔, 등대, 경인철도, 갑문식 도크 등 각종의 근대문물과 사회시설 등이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렇게 문화유산이라는 퍼즐을 조각조각 맞추어 인천역사의 성격을 통찰하다보면 인천이 도전과 응전의 경험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공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라를 처음 열었던 곳, 바다 길을 통한 최초의 교류지, 근대문화의 선구지 역할도 하였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천의 오늘은 이런 역사의 선구자로서의 시련과 도전을 극복했던 결과라 할 것이다.

 

최근 신포동, 북성동, 동인천동 등 중구 개항장일대 537114가 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근대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 인천발전의 지향점은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에 따른 도시의 정체성 정립을 뒷받침해 줄 문화유산발굴과 체계적 보존을 통한 역사문화도시 인천 구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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