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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개항장 인천의 서양 상사商社들

by 형과니 2023. 6. 15.

개항장 인천의 서양 상사商社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11-22 22:39:36

 

 

18831월 인천의 개항은 기존 부산과 원산의 개항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서해안의 요충지였고 수도 서울로 진입하는 최단거리였으며, 그 초기부터 서양 여러 나라를 위한 개항이었기 때문이다. 개항장 인천에는 서양과 미국계 상사들이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소규모 상점과는 달리, 자본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도 그들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글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한국에 제일 먼저 진출한 서양의 상사는 1883년 영국계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 & Co.)이었다. 이화양행은 1832년 영국의 스코트 윌리엄 자딘(Scots William Jardine)과 그의 대학 후배인 제임스 매티슨(James Matheson)이 중국 광저우에 설립한 상사로, 현재까지도 홍콩에서는 유력한 재벌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화양행의 조선 진출은 청나라의 추천으로 조선의 고문관이 된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부임하기 이전부터 이화양행의 상하이 지점장과 조선의 광산채굴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다. 이화양행은 우피(牛皮)무역에 종사하면서 청국 초상국(招商局) 소속 660톤 급의 기선 남승호’(南陞號)를 투입하여 나가사키(長崎)와 부산을 경유하여 인천과 상해를 연결하는 한국 최초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광산채굴권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당시 인천항 중국인 거류지 앞 바다에 폐선을 띄워놓고 사무실 겸 창고와 일꾼들의 거주지로 사용했다. 부업으로 보험회사의 대리점 역할도 겸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 보험업의 시작이었다. 정기선 운항은 1년간의 계약이 만료되자 누적된 운항 결손으로 중단하였고, 188411월에 이르러서는 영업부진으로 인해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들의 내한 목적은 교역보다는 처음부터 광산채굴권에 있었다.

 

18969월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었던 영국선박회사 홈링거(Holme Ringer, 咸陵加)양행이 제물포에 지점을 개설했다. 홈링거양행은 주로 영국으로부터 양철, 유리, 시멘트, 그리고 페인트 등을 수입하여 우리 건설 공사장에 독점 판매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또한 홍콩상하이은행(香港上海銀行)의 대리점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주로 중국·영국 및 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송금업무를 담당하여 그 활동범위는 좁았다.

 

1902년 영국인 베네트(W. G. Bennett)는 일본인 에바라(潁原修一朗)와 합자해 일영무역상회를 설립하였는데 후에 베네트가 독자적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광창양행(베네트상회)으로 개칭하였다. 베넷이 인천에 언제 도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98년 그가 홈링거 양행의 지배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의 장인(丈人)이었던 글로버(Thomas Blake Glover)’는 나가사키에서 글로버 상회(Glover & Co.)를 운영하여 치부한 인물로 이화양행의 대리인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보면 광창양행은 이화양행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고, 글로버 상회의 한국 지사 역할을 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제물포의 존스턴별장은 1905년에 건립되었는데, 별장주인 존스턴은 상하이에서 온 영국 상인으로 이화양행 설립자 윌리엄 자딘과 일가친척이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단순히 여름피서를 위해 인천에 왔다기 보다 조선의 광산채굴사업 때문에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상사의 진출도 두드려졌다. 모스·타운센드상회(Morse and Townsend & Company)18845월 일본 미국무역상사 조선지점으로 인천항에서 출발하였다. 1883년 고종의 지시를 받은 김옥균은 요코하마의 미국무역상사를 찾아가 모스와 차관교섭을 시도하였는데, 이듬 해 4월 울릉도삼림벌채권 양도계약을 체결한 뒤 모스는 타운센드를 조선의 지점장으로 파견하여 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885년 초 타운센드는 인천의 순신창상회를 인수하고, 한국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하기도 하였는데, 1888년 이래 무기를 구입하여 조선정부에 납품하면서 면세혜택까지 받았다. 그리고 왕실관련 사치품 납품, 전기관련 용품 등을 납품하고, 왕궁전등시설 공사에 참여하였다. 1892년부터는 증기력을 응용한 타운센드정미소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후 모스가 철도 및 광산이권에 관심을 기울이던 1894년경부터는 독립상회를 계획, 1895년 모스의 권리를 매수하여 타운센드상회(Townsend & Co.)로 개칭하였다. 그는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톤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18973월 미국의 거대석유기업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독점판매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1900년 율도에 폭약창고를 건설하여 세창양행과 함께 폭약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가장 오랫동안 두드러진 활동을 남긴 것은 독일계 세창양행이었다. 세창양행(E. Meyer & Co.)18846월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로 마이어(H. E. Meyer)와 볼터(Carl A. Wolter)의 합작회사였다. 마이어는 주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면서 유럽-동아시아 무역을 총괄했고, 칼 볼터는 세창양행의 지사장으로 파견되어 당시 조선의 외교·통상·관세·재정을 주도하고 있던 묄렌도르프와 긴밀한 협조 아래 경제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세창양행은 독일산 바늘, 염료, 금계랍(金鷄蠟:키니네),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했고, 조선산 쇠가죽, , 콩 등을 수출했다. 얇고 견고한 세창 바늘은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해열 진통제인 금계랍은 학질 치료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광고를 통해 회사의 인지도를 높였던 관계로 세창이라는 상표는 조선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세창양행의 주요한 수입원은 차관, 선박운송, 기술자 초빙, 광산권 개발 등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이권 사업이었다.

 

1907년 볼터는 마이어와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세창양행을 단독으로 경영했다. 이미 서울과 인천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볼터는 제물포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했다. 세창양행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영문 표기는 Carl Wolter & Co.로 변경되었다. 세창양행은 이름자 그대로 영원한 번창을 누리려 했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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