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와 랑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1-01-12 00:32:05
석유와 랑뿌
글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석유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불을 밝힌 시초를 1880년이라고 기록한다. 다시 말해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 인사들과 가까웠던 한말의 개화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램프·석유·성냥 같은 일본 제품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최초의 석유 도입을 1880년이라고 쓰고 있다. 석유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과 함께 성냥에 관한 이야기도 보인다.
1880년 처음 석유사용
“석유는 영국·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는데 어떤 사람은 바다 가운데서 취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석탄에서 빼낸다고 하며 어떤 이는 돌을 삶아서 짜낸 것이라 하여 말들이 구구하다. 그러나 그것이 천연자원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년) 후에 비로소 석유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붉은색이 나고 냄새가 고약했으며 한 홉(合)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색깔이 점점 하얘지고 냄새도 점점 좋아졌으나 화력이 감소되어 1홉을 가지면 겨우 3, 4일밖에 불을 켜지 못했다. 석유가 나오면서부터 산이나 들판에 기름 짜는 열매는 번성하지 않았으며 전국적으로 연등(燃燈)을 갖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중략> 양수화통(洋燧火筒)이 또한 석유를 같이하여 성행했으니 민간인들은 자기황(自起黃)이라 불렀다.”
재미있는 대목이 ‘돌을 삶아서 째낸 것이라’는 말인데 아마 이 기름의 이름을 ‘石油’라고 표기하는 데서 그런 추측이 나돌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 홉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는 구절로써 1880년대에 이미 석유가 등유(燈油)로 널리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끝부분의 ‘양수화통’은 ‘서양부싯돌’이란 말로서 ‘자기황’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문지르거나 무엇에 부딪히면 불이 일어나도록, 화약에 다른 물질을 섞어서 만든 고체의 황’ 곧 성냥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부산 지역은 이보다 훨씬 앞서 일본과의 물자 교류가 진행되어 오고 있었으니 실제로는 더 일찍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인천에는 언제 석유와 램프가 들어왔을까.
아무런 기록이 없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인천에는 적어도 개항과 함께 일인이나 서양 무역회사들이 들어오면서 석유와 램프를 가지고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차츰 한국인 가정으로도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 신태범(?兌範) 박사의『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얼핏 이런 구절이 있다.
“야간 조명은 석유랑뿌(lamp)라고 부르는 석유 등을 사용하고 있었고, 큰 거리에는 석유 보안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석유 랑뿌가 한국 촌으로 들어와서는 석유남포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램프라는 발음이 서툴러 랑뿌라고 했었던 것 같다. ‘램프는 보통 금속이나 유리로 만든 석유용기에 구금(口金:흡입구)을 달고 면사(綿絲)로 만든 심지를 세운 다음, 그 주위를 유리로 만든 등피를 씌운 것’으로 우리 전통의 등잔과는 다르다.
미국계 타운센드상회가 독점취급
이 램프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1850년을 전후하여 선진국들과 통상(通商)을 맺으면서’부터라고 하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잘못일 듯싶다. 선진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최초가 바로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조약으로 1882년이기 때문이다. 1850년 전후해서는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극소량의 이런 개화 물품이 입수될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일 뿐이다.
인천에서 석유를 취급한 무역상은 미국계 타운센드(Townsend 陀雪仙)상회로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 통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1897년 3월에는 미국의 거대 석유기업 스탠다드석유회사의 독점판매권을 획득하였다. 타운센드는 1900년 부산 절영도(絶影島)에도 석유 판매소를 짓기 위해 자국 영사 알렌을 동원하는 등 전국적인 판매망을 가지려 했다. 그러니까 이 무렵이면 조명용 석유가 거의 전국에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랑뿌’ 역시도 전국에 보급되었을 것이다.
당시 석유는 사과궤짝 비슷하게 생긴 나무 상자에 담아 팔았다. 크기는 사과궤짝보다 다소 적은데 그 안에 석유가 든 깡통이 두 개 정도 들어 있었던 듯하다. 이 깡통은 남아 전해지는 것이 없고, 궤짝만은 “미국 뉴욕 솔표 석유”라는 한글 문구가 찍혀 있는 채 전해진다. 인천시립박물관과 차이나타운의 한국근대박물관에도 한 점이 보관되어 있다.
석유값은 1896년 6월 6일자 독립신문에서 볼 수 있는데 ‘석유 한 궤에 72냥’으로 ‘쌀 중품 한 되에 3냥, 서양목(西洋木) 중품 한 자에 2냥, 무명 중품 한 자에 1냥, 베 중품 한 자에 3냥, 소금 중품 한 섬에 35냥’ 등 다른 주요 물가 시세에 비해 제법 고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이듬해부터는 ‘1궤에 14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포장 단위가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1896년 기록에 오차가 있었던 것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금액 차이를 보인다.
아무튼 ‘돌을 삶아서 짜낸’ 석유가 우리나라에, 인천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 빛으로도 조금씩 개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석유와 랑뿌 이야기를 쓰면서, 어둠을 밝힐 수단을 가지지 못한 민족, 국가는 언제까지고 역사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그런 진리도 생각해 본다.
Tip
별난역사, 별난물건 시리즈에 게재된 석유등, 남포등의 자료와 실제모습은 중구 차이나타운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엔 희귀한 근대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천근대박물관의 관람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료는 성인 3천원, 학생 2천원. 문의 76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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