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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18. 신년과 세찬(歲饌)

by 형과니 2023. 6. 16.

18. 신년과 세찬(歲饌)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1-08 18:53:31

 

떡국보다 흰쌀밥 더 어울리는 굴비 두그릇 뚝딱

18. 신년과 세찬(歲饌)

 

어느덧 2011년 새해가 되었다. 지난날 하던 대로라면 신정(新正)’을 맞은 셈인데, 그나마 전에 같은 기분도 별로 나지를 않는다. 당시 동네에는 드문드문 신정을 쇠던 집들이 있어서 설빔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 놀거나 어른들 세배 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풍습이 완전히 바뀌어서 강릉 정동진이니, 울주 간절곶이니, 하는 해돋이 명소로 달려가 신년 첫 일출(日出)의 장관이나 구경하고 돌아와 그저 하루 휴일을 즐기는 정도다.

 

구정(舊正)이라고 부르던 설날이 와야 비로소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고 전국의 귀성길이 떠들썩하면서 명절 기분이 날 터이다. 민족 전체에게 설날, 이 날이 정통 우리 명절이라는 의식이 박혀 있는 듯하다.

 

1950년대 자유당 시절과 박 대통령 정부에서 양력 정월 초하루, 곧 신정(新正)을 명절로 강제하려 하고, 민간은 그 오랜 풍습과 전통을 못 버리고 음력 정월 초하루, 구정을 고집했었던 때가 있었다.

 

공무원이나 사회 저명인사들은 어쩔 수 없이 신정을 쇠었다. 물론 거기에다 완전히 사고가 서양화된 신식 인사들도 신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만년 이 나라 흙 속에 깊게 뿌리박은 농경민족의 의식이 정부에서 그런다고 차례상을 양력 정월 초하루에 차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튼 당시 나라는 나라대로 이 민족의 전통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양력 정월 초하루, 신정 날이면 겨울 방학 중인 데도 학교에 소집되어 갔다. 그 전 해 12, 방학에 들어가면서 나눠준 생활계획표에는 11일이 신년 기념식 날이어서 이미 임시 등교일로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눈 쌓인 운동 마당에서 발이 시린 채, 신정을 지내야 한다는 요지의 교장 선생님 훈화를 듣고 온 겨레 정성 덩이 해 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이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운운하는 설날 노래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개학을 코앞에 두고, 혹은 아쉽게 개학을 하자마자 설날이 온다.

 

이렇게 신정과 구정이 약 한 달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벌어졌던 당시 일화도 생각난다. 다 가난이 죄였는데, 지금 노년을 향해 가는 나이임에도 당시 어린 마음에 남았던 그 응어리 같은 것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물론 나 역시 여러 해 전, 어느 일간지에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있기도 하다.

 

신정, 구정, 설을 쇠는 가정이 제 각각이어서 양력 설날에 설빔을 차려입는 아이에 대해 어른들이 시킨 대로 우리 집은 음력설 쇤다. 난 그때 새 옷 입을 거다.’ 하며 부러운 마음을 설날로 미루다가 막상 설날에 닥쳐서는 나라에서도 구정을 쇠지 말라 하며, 더구나 신정이 지난 지가 엊그제인데 이제 또 무슨 설 타령이냐?’는 타박을 맞는 것이 예사였다. 물론 어린 손자에게 이렇게 둘러대시던 할머니의 심정은 오죽 하셨으랴.”

 

이제는 설을 이렇게 쇠라, 저렇게 지내라, 하는 그런 억지 시대도 아니고, 또 살림 역시 그토록 군색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도 아닌 데도, 설날이 옛날처럼 그렇게 마음 흥겹고, 가슴 풍성하지가 않은 느낌이다. 음식 장만도 그렇고 설빔도 그렇고 또 놀이도 그렇다. 모두가 신문물, 신풍조로 싹 바뀌어서 그럴 것이다.

 

설날이 오면 그야말로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이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설레는 마음으로 새 옷을 입고 새로 산 양말과 신발을 신는 날. 차례만 지내고 나면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날. 그뿐인가. 평소 무섭기만 하시던 아버지도 연방 웃음을 터뜨리시던 날. 이런 호사스러운 날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었으면…….”

 

역시 그 일간지에 썼던 글의 일부인데, 배고프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집안 형편이 좀 나았던 해, 특히나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엿한 가문처럼 세찬(歲饌)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우리 인천의 특산 어물들이 오히려 갈비찜, 떡산적 같은 고귀한 음식보다 맛있었다.

 

세찬이라는 것은 설날에 차례상과 세배 손님 대접을 위해 준비하는 여러 가지 음식을 이른다. 세찬은 또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거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을 이르기도 한다.’ 세찬은 옛날에는 연말이 되면 조정에서 대신이나 종척(宗戚), 각신(閣臣)에게 쌀, 고기, 생선, 소금 등을 하사하였고, 사대부나 종가에서는 어려운 일가에게 쌀, 고기, 어물 등을 보내어 설을 쇨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 세찬 중에는 꼭 끼는 것이 생선, 어물임을 알 수 있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우리 맛 탐험에 보면 광복 전에 서울 대갓집 간에 고급 세찬감으로 오가던 동해산 자반방어, 산뜻한 자반준치, 토속 미각의 왕자인 굴비, 그리고 겨울 내내 도시락 반찬으로 질려 버렸던 흔하고 천하던 자반청어 등 자반에 얽힌 이야기는 적지 않으나 지금은 현품이 없으니 입을 열 수조차 없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자반방어는 입에 대 본 기억이 없지만, 자반준치의 산뜻한미각은 기억에 좀 남아 있고, 또 인천에 나서 자란 행운이 있어 어물 세찬감 중에 토속 미각의 왕자인 굴비진미는 썩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지난봄에 으로 사다 국을 끓이거나 굽거나 하고도 수십 마리를 천일염장해 널어 말려, 눈에 하얗게 소금 성에가 낀 굴비는 설날 세찬으로 최고의 맛을 지녔다.

 

구운 굴비의 가미(嘉味)도 극상이라고 하겠지만 갖은 양념을 해 밥솥 증기에 쪄낸 것은 더욱 우수하다. 염장

 

을 했다고 해도 오랜 동안 지나면서 살짝 곯은 듯한, 그래서 콧속으로는 엷게 상한 속 냄새가 풍겨오지만 밥과 함께 목구멍을 넘길 때의 그 짭조름하고 기름진 맛은 가히 일품 중에 일품이다. 오히려 설날의 보편적인 세찬 음식 떡국보다 흰 입쌀밥이 굴비에는 더 어울려서 두 그릇도 좋다, 포식을 하게 된다. 굴비가 인천을 통해 서울 등 다른 여러 지역으로 퍼졌을 것은 당연하나 인천 사람들처럼 흔하게 먹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자반준치는 흔하게 먹어 보지는 못 했지만 맛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아마 살이 좀 물러 염장 보관이 다른 생선보다 어려워서 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입 안에서 얌전히 씹히는 그 부드럽고 삽상한 상미(上味)는 인천 사람이라도 60은 넘은 토박이들이나 알 것이다. 이것도 물론 준치가 인천 근해에서 많이 잡힐 때 이야기인데 1970년대 이후 어획이 부쩍 줄어들고 말았다.

 

굴비 말고 인천 사람이어서 또 한 가지 바닷것의 프리미엄이 있었다면 민어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 한 철 인천 근해에서 잡히는 생선 민어는 인천과 서울의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남아도는 민어를 절여 바짝 말린 것이 암치다.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설명을 해야겠다. 민어는 몸집이 커서 조기처럼 통째로 말릴 수가 없다. 대가리를 떼어내고 내장을 꺼낸 후 네 쪽으로 발린 몸체를 한 장으로 펴서 방석 모양으로 말린다. 바짝 말린 짭짤한 암치는 굴비와 함께 소중한 보조식품이었다.”

 

이 글 역시 신 박사의 저서에 나오는 암치에 대한 설명인데, 물론 말린 민어 알, 곧 어란까지 포함해서 온전히 인천의 특산이라고 할만 했던 식품이다. 이 암치를 앞서 굴비찜처럼 쪄 내면 역시 군침과 함께 회가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의 보통 가정의 세찬이라면, 그 중에서도 인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음식이 이런 어물류였다. 이제는 이들 어물들이 씨가 말라 구경을 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런 글을 아무리 써 보아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남의 나라 음식 이야기처럼 듣는다. 신년 정초에 문득 어물로 풍성했던 인천의 옛날이 떠올라 해 보는 이야기이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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