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역사산책

17. 차이나타운

by 형과니 2023. 6. 16.

17. 차이나타운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12-23 23:20:06

 

대성황 암울 활기 인천속 작은 중국

17. 차이나타운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사실이지 차이나타운이라는 말이 좀 설게 느껴진다. 그저 청관(淸館),’ 이렇게 부르는 것이 훨씬 익숙하고 편한 느낌이 든다. 필자만 해도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50년 이상을 입에 올리던 이름이니 그럴 것이다.

 

개항과 함께 일본이 지계를 설정하자 청국 주둔군 사령관이자 통상교섭총리 원세개(袁世凱)가 일본에 뒤질세라 동일한 행동을 취한 것이 이른바 청국 지계의 설정, 곧 화교 사회의 출발이었다.

 

원세개는 18844월 지금의 중구 선린동 지역 약 5천 평의 땅에 지계를 설정하고 영사관을 개설하는데 처음에는 청국이사부(淸國理事府), 혹은 이사서(理事暑)라고 호칭하던 것을 우리 한인들은 청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980년대의 차이나 타운.

 

청관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느끼는 것은 청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끈기와 강인함과 적응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지계 페지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패망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어 낸 것이다.

 

그 단면을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속이 깊고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그들이라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세월을 보냈는지 러일전쟁 때까지 등록 인구가 56백 명이나 늘어난 것을 보면 번영은 계속되었던 모양이다.”라고 당시 청일전쟁 패전 후의 청관 표정을 그리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지계 설정 당시로 돌리자. 지계 설정으로 통상 교역이 개시되자 군납업자 동순태(同順泰)를 선두로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지흥동(誌興東), 쌍성태(雙盛泰) 같은 거상들이 중국 본토와의 무역에 있어 지리(地利)가 있는 인천항에 자리를 잡고 교역을 개시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신 박사는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수직 면포와 명주밖에 없던 우리에게 광목과 옥양목 같은 새로운 기계 면직물과 비단을 선보이고 설탕, 밀가루, 성냥, 비누, 권련 등 많은 개화 상품을 소개했다. 급증하는 수요에 따라 거래는 활기를 더해갔으며 더구나 1개월 후불이 가능한 연불제라는 청국식 도매 방식 때문에 한국 상인의 인기를 끌었다. 차츰 소매상점이 생기고 행상도 전국으로 퍼졌다. ‘비단장수 왕 서방이라는 노래가 나돌 만한 형편이었다.”

 

이와 같은 청인 무역상들의 인천에서의 번성은 더 많은 청국인의 유입을 자극해 일본 지계를 건너 삼리채(三里寨) 간선 도로변까지 넘쳐흐르게 되었다. 가로 연변에는 포목점, 요리점, 이발소, 채소점, 호떡집 등 잡화점이 자리를 잡았다. 내동 6번지 일대 구릉지역에는 청인 공동묘지인 의장지(義葬地)까지 설치되었다.

 

청관은 청일전쟁 패전으로 일부 거상과 아녀자들이 본국으로 철수한 이래 그럭저럭 평온을 유지해 왔는데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또 한 번 타격을 받게 된다. 이제 한국 내에서 실권은 일본이 쥐고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청관 거상들은 대부분 철수하고, 한국인 신세나 다름없는 일부 계층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청관 사람들은 한국 강제 병탐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일본에 체류하는 외국인 신분이 되었지만 청관은 다소의 위축은 있었으나 대체로 평온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지계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청관은 그대로 존재했고, 오히려 1915년에는 폐업 직전의 일본인 소유 대불호텔을 청관의 유지가 매입해 중화루(中華樓)라는 유수의 청요리집을 개업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던 것이다.

 

청관의 융성은 적어도 1931년의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계속되었다. 중화루의 인기에 이어 동흥루(同興樓), 평화각(平和閣) 같은 일류 요리점들이 속속 생겨나고 경동, 답동, 창영동 등지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호떡집들이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일본의 간교(奸巧)로 촉발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한때 한중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한국인촌으로까지 진출했던 상인들이 청관으로 철수하고 화교 사회는 다시 한 번 위축을 경험한다. 거기에 일본 군부가 획책한 만주사변이 잇달아 발발하고 뒤이어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일본의 적국이 되어 온갖 핍박을 받게 된다.

 

청관을 지나정(支那町)이라 낮춰 부르는가 하면 화교들에 대해 거주지를 제한하고, 경제적 제제를 가함으로써 상당수의 화교들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대다수의 화교들은 끈질긴 생활 저력과 희로애락에 동요하지 않는 느긋한 정신 자세로 버텨 나갔다. “사태 변화에 나름대로 슬기롭게 적응하는 대국적 기질은 모든 중국 요리집과 푸성귀전, 그리고 채소 농가와 노무자는 광복 때까지 태연하게 생업을지켜 나가게 했고, 끝내 화교 사회의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주마간산 격으로 청관의 내력을 훑어보았으니 이제 중국 요리와 자장면과 청관의 인상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청요리의 본산은 아무래도 인천이다. 청요리의 명성은 광복과 6?25 이후까지 이어졌었다. 이밖에도 인천에는 수많은 청요리점과 만두가게가 있었으나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문을 닫게 되고 화교들 대부분이 대만 귀국이나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떠나고 만다.

 

중국 음식점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자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정식 요리라고 할 수는 없는,

 

1980년대 영화 오 인천촬영 당시의 차이나타운 풍경

한국 인천 태생의 중국 음식, 자장면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 자장면의 발생은 틀림없는 인천인데, 개항 이후 인천 드림을 따라 인천으로 건너온 중국인 꾸리(苦力)들의 간편식(簡便食) 끼니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음식이 공화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특히 ‘1905년 공화춘에서 처음 자장면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는 공공연한 기록들도 눈에 띄는데, 지나친 단정이라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비빔밥이 몇 년도, 어느 점포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화춘설을 주장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런 자료가 어디에 전해지는지 궁금하다.

 

공화춘은 중화루와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고급 청요리점(淸料理店)으로 크게 명성을 날리던 점포였다. 195060년대에는 서울에서 고관대작들도 이곳 요리를 즐기러 내려오던 곳이기도 했고, 인천 상류층의 결혼식 호화 피로연 장소로도 각광을 받았던 곳이었다.

 

물론 공화춘은 요리업과 함께 그 당시 객잔(客棧)이라고 부르는 중국식 여관 영업도 함께 했기 때문에 쿨리들이 합숙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에 따라 집단 급식용(?) 간편식 자장면이 여기서도 음식으로 판매되었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그것을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언자가 없는 데다가, 아무런 문건 기록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공화춘 원조설(元祖說)을 선뜻 단언하기가 어렵다.

 

아마 인천에 몰려온 가난한 중국 노동자들이 값싸고 신속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기들 본토의 음식을 응용한 이 같은 한국형 자장면이 발생하였다가, 몇몇 중국 음식점 메뉴로 전해지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한국 최초, 그리고 유일하게 인천에 자리잡은 청관은 우리 음식 문화사에 자장면의 탄생이라는 기록도 남겼다는 점이다.

 

1950년대 우리가 어려서는 청관의 특이한 풍경 중에 하나가 여인들의 전족(纏足)이었다. 남자들의 변발(?)은 이미 사라져 못 보았지만, 전족을 하고 커다란 링(Ring) 모양의 귀고리를 단 중국 여인들의 뒤뚱거리며 걷던 그 우스꽝스럽고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매우 신기하게 구경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신 박사의 글 속에 보이는 불딱총(폭죽)과 원소절의 무룡(舞龍) 행렬과 삼국지, 서유기 속의 등장인물로 변장하고 높은 나무다리를 탄 채 벌이는 가장 행렬 등 춘절(春節) 15일간의 호화찬란한 구경거리와 축제를 우리 어려서는 거의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소설가 오정희(吳貞姬) 작품 중국인 거리에도 아주 음울하기만 한 청관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들 그 연령 때에는, 해방에서 6?25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격변, 격동과 함께 퇴락해 가던 청관의 암울, 그리고 어두컴컴한 피폐의 그늘밖에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6?25를 거치고 197080년대에 이르면서 점차 화교들이 떠나고 청관은 더욱 음울하게 퇴락해 간다. 이유를 흔히 혁명 후 박정희 정권이 취한 대 화교 정책에서 찾는데, 전쟁 후 그들이 장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우리 경제력과 당시의 국내외 정세도 그들이 인천을 떠나도록 한 한 가지 중요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요일이면 청관 스케치를 나가는 미술반 친구들을 따라가 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건물과 거미줄이 둘러쳐진 공가(空家)를 둘러보기도 했다. 둥근 사슬처럼 생긴 큰 귀고리를 하고, 전족(纏足)을 한 채 우스꽝스럽게 기우뚱거리며 걷던 중국 여인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청관은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 정적과 음울(陰鬱)과 귀기(鬼氣)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빈사의 지경까지 갔던 청관이 근래 다시 살아나 인천 속의 작은 중국으로 대단한 활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사진제공=김보섭 사진작가

 

 

 

 

'김윤식의 역사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인천과 인천책  (0) 2023.06.16
18. 신년과 세찬(歲饌)  (0) 2023.06.16
16. 사라지는 숭의공설운동장  (0) 2023.06.16
15. 소설(小雪)과 김장  (0) 2023.06.15
14. 사라진 인천의 영화관들  (0) 2023.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