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라진 인천의 영화관들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11-17 21:04:57
멋들어진 변사 목소리 아직도 귓가에 쟁쟁
며칠 전, 중구문화원을 가기 위해 인성여고 앞을 지나다가 문득 옛날 시민관(市民館) 기억이 떠올라 혼자 속으로 웃었던 일이 있다.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는 영화관이어서 오고갈 때마다 그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며 어떡하면 저기를 들어가 보나 안달을 하던 게 생각나서였다.
참 공교롭게도 이 건물이 지금은 여학교 체육관으로 쓰이고 있으니 또 쉽게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어쨌거나 이 건물의 주인인 인성여고가 우리나라 여고 농구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어서 더욱 묘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애초 이 시민관은 1922년 일본인들이 공공 집회 장소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의 인천공회당이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어 고쳐지었는데 1958년경부터는 시민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영화관처럼 영화를 상영했다.
1960년 중학에 입학해서 처음 단체 관람을 한 영화가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토니 커티스가 주연으로 나온 ‘바이킹’이었다. 1963년 2월인가,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는 마치 인생을 졸업이나 한 양, 신생동에 있는 유명한 중국집 신성루에서 자장면과 함께 배갈까지 한 잔을 곁들이고는 여기 시민관에 버젓이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물론 ‘기도’ 아저씨가 이 눈꼴시고 어리숙한 중생들에 대해 질끈 눈 한번 감아 준 덕분이었지만, 졸업 앨범과 둥글고 긴 졸업장 통을 옆구리에 낀 애송이 모습들을 상상하면 참 발칙하고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보았던 영화가 한국 아버지 상이라고 하는 고 김승호 주연의 ‘로맨스 빠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8년에 발간된 연감을 보니 그 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영화를 관람한 연관객수가 무려 75만5천848명에 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연전에 어느 일간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천 인구가 고작 30만 정도였을 때니까 시민 모두가 1년 동안 두 차례 이상 영화를 본 셈이 되는 것이다. 휴전 5년 후의 시절이면 대부분 호구(糊口)문제가 지상 과제였을 터인데도 영화관을 찾은 발길이 이런 정도인 것을 보면 우리 인천 시민들이 영화, 연극 예술에 대해 가졌던 애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한 짐작이 간다.”
그 이전까지 인천에는 애관, 동방, 시민관, 문화 그리고 부평극장, 이 5개 극장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1958년 무렵에는 완전히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부쩍 살기가 좋아졌는지 5개 극장 말고도 장안, 인천, 미림, 서부극장(산곡동)까지 합세해 총 9개 극장이 흥행 기록을 보인다. 극장 규모로는 역시 시민관이 가장 커서 1천석이나 되었다. 두 번째가 인천극장으로 900석, 그리고 그 다음이 애관극장으로 650석이다.
“애관, 시민관, 장안, 인천, 미림 등은 영화와 연극을 흥행 종목으로 했기 때문에 이들 극장에서는 종종 ‘임춘행 악극단’이니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니,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관객의 총 수는 실상 순수한 영화 관람객 수만이 아니라 악극단 관객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뒤에도 연달아 극장들이 문을 여는데 그 첫 주자가 세계극장이다. 인근에 유곽지대였던 선화동과 수인역, 그리고 정미소가 모여 있어 흥행을 노리고 신흥동에 자리잡은 듯하다. 1962년 중3 신분으로 침침한 밤길을 걸어 ‘양녕대군의 주유천하’라는 영화를 보기도 했다. 세계극장에 뒤이어 생긴 극장들이 자유극장, 현대극장, 그리고 오성극장이다.
세계극장은 예상과 달리 개봉관으로 크게 빛을 못보고 일찍 문을 닫고는 단란주점으로 댄스홀로 전전했었다. 현대극장은 근래까지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싸구려 물건을 대량으로 파는 매장으로 쓰이곤 했다. 오성극장은 옛날 인천문협 회장을 지냈던 고 최병구 시인과 자주 신세를 지곤 하던 극장이었다. 그때 고마움을 이제 뒤늦게나마 표한다. 이 극장은 후일 애관에 흡수되어 애관 제2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유극장은 뒷심 좋게 늦게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4, 5년 전에 문을 닫은 것 같다. 도로를 넓히면서 반동강이가 되었다. 나머지 반은 지금 무슨 가게 창고처럼 쓰이고 있다.
극장이라고 부르기도 뭣하지만, 도원동 덴뿌라 골목으로 해서 월남촌이라고 부르던, 유동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샛길 언덕에 이른바 용사회관이라는 허름한 극장이 있었다. 6?25전쟁 참전 상이용사들이 운영했다고 해서 극장 이름이 용사회관이었는데 어디에도 이 극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대로에 면하지 않고 이면에 있었던 데다가 시설이 다른 극장에 비해 워낙 떨어지고, 상영하는 영화조차도 무성영화가 태반이어서 더욱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
1950년대 후반 이 극장에 처음 갔을 때는 ‘기도’ 아저씨가 문 앞에 서서 손으로 표를 받았다. 보통 다른 극장과 달리 기도가 앉는 자리도, 표를 넣는 통도 없었다. 외곽 전면만은 옹색한 대로 극장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놓았지만 지붕은 천막이었고 객석 의자가 없어서 바닥 흙을 계단처럼 경사지게 만들어 거기에 가마니를 깔고 앉았다.
“여기서 인어공주 어쩌구 하는 온통 빗금 투성이, 낡디 낡은 무성영화를 처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토키도 없고 시네마스코프도 아니었지만 화면은 천연색이었다. 높다란 영사실 창문 옆에 앉아 멋들어진 목소리로 주워섬기던 변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한때는 내 형이 매일 저녁 나를 청중으로 삼아 이 변사의 흉내를 내어 몹시 지치게 하기도 했다. 이 용사회관은 오래지 않아 문을 닫은 것으로 기억한다.”
1960년대 초반 무렵에 생겼다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도원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숭의공설운동장 육상장 동
북쪽 끝에 있었는데, 도심인 중동구를 벗어난 곳인 데다가 인근에 고작 숭의깡시장이 있고, 대장간, 기름집, 오꼬시 같은 과자를 파는 가게, 미군 맥주 깡통 세공업자, 목수간, 영세 철물점 따위가 늘어서 있던 주변 환경으로 보아 흥행이 그다지 좋았을 리 없다. 그야말로 변두리 극장 신세를 못 면하고 일찍 문을 닫았다.
장안극장은 우리가 이사한 숭의동 집 아래쪽에 문을 열었는데, 영화 상영 전에는 늘 유행 가요를 밖으로 크게 틀어놓아 도미라는 가수의 ‘청포도 사랑’ 박재란의 ‘청춘의 푸른 날개’ 운운하는 노래를 저절로 배웠다. 장안극장도 텔레비전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1970년대 말경 문을 닫고 말았다.
참으로 시설이 엉망이었던 송현동의 미림극장도 번듯하게 변모했다가 그것을 끝으로 운명했는데, 2000년 초반 ‘첫사랑’이란 영화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금곡동 샛길 주변에 온통 뱀탕집이 늘어서 있던 문화극장은 여러 해 전 피카디리라는 이름으로 면모를 일신하면서 정문 매표소도 금곡동 쪽에서 송림동 쪽으로 방향을 옮겼지만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높다란 상업 빌딩이 들어서 있다.
문화극장에서는 고등학생 시절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리버티 바란스를 쏜 사나이’라는 서부 영화와 1970년대 초중반 더스틴 호프만의 ‘졸업’과 알랑 드롱의 ‘아듀 라미’ 워렌 비티, 페이 더너웨이 주연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 수준작들을 본 기억이 난다.
없어진 동방극장과 그보다 훨씬 뒤에 생겨났다가 사라진 키네마극장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둘 다 자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인천의 대표적인 개봉관으로 명성이 높았었는데 아쉽게도 TV시대, 인터넷 시대, 그리고 극장의 첨단 복합 대형화 추세에 밀려 세월의 뒤안길로 나앉고 만 것이다. 그나마 인천의 최고참 개봉관 애관이 그동안의 역경을 이기고 복합관으로 재정비, 꿋꿋하게 버텨 나가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
알려진 대로, 애관은 그 전신이 1894~5년 부산 동래 출신 인천 거부 정치국(丁致國)이 세운 인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였다. 이 극장이 한때 축항사(築港舍)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25년경부터 애관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 이름만도 85년이나 나이를 먹었다.
CGV 같은 첨단 복합 시설을 갖춘 대규모 상설 영화관이 등장하고 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일반 영화관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무릇 모든 존재가 명멸(明滅)하고 변전하는 것이 이치이지만 불과 반세기 동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또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진 인천의 영화관들을 생각하면 실로 무상한 감이 든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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