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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13.옛 수인역 부근

by 형과니 2023. 6. 15.

13.옛 수인역 부근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11-13 12:27:49

 

반세기전 철로 옆 풍요로운 늦가을 곡물시장

13. 옛 수인역 부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할 만큼 지나온 과거를 쉽게 잊는다. 아름다웠던 일이든 궂은일이든 가릴 것 없이 기억은 점차 마모되고 이지러져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날에 찍은 도시 풍경 사진을 보면, 우리가 무수히 그 현장을 지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기 일부분처럼 끼어 살았었는데, 어느 결엔가 그 같은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낡은 사진 한 장--옛날 수인역 부근 사진을 보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에 젖게 된다. 쌀자루, 콩자루를 메기 위해 할머니를 따라, 자주 이곳 수인역 시장에 나오곤 했었는데,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좁고 초라한 열차 칸에 실려와 매애애, 매애애 하고 울던 염소새끼들도, 발이 묶인 채 푸드득거리던 닭들도, 새끼돼지도, 강아지들도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다. 참기름, 들기름, 피마자, 봄이면 나물류, 여름이면 애호박, 오이,상추, 깻잎 같은 푸성귀들, 가을이면 무말랭이,늙은 호박, 고구마줄기, 시레기 말린 것들,그리고 참빗, 곰방대 같은 잡화류 따위가 풍성했던 수인역 부근을 아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 붙은 설명대로 수인역 부근의 곡물시장이라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도 그 또한 유명한 시장이었다. 인천 외곽과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의 곡물 산지(産地)에서 개인들이 소규모이지만 중간 상인을 붙이지 않은 채 직접 들여오는 것이어서 값이 눅고 품질도 양호했으니 말이다.

 

사진 풍경으로 보아 아마 1960년대쯤이 아닐까 싶다. 6·25전쟁의 황폐를 어느 정도 털어낸 듯, 사진 속 상가 건물들이 비교적 말끔하게 보이는 데다가 상인이건, 장을 보러 나온 손님이건, 악착스런 맛도 없고 소란하지도 않은 채,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뒤일지 모르겠다.

 

기찻길이 협궤가 아니고 광궤이기 때문이다. 1972101일에 수인역과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이때부터는 송도역이 수인선의 인천 쪽 종점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사진 속의 철길은 용현동 유공저유소나 학익동 동양화학 등 큰 회사들을 위해 유류 운반, 혹은 자재나 원료를 하역하기 위해 인천항과 직접 연결된 기찻길이다. 물론 그 전에는 여기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의 군수 물자 입항에 따라 하역과 수송을 하기 위해 가설한 항만 철도였다.

 

사진 속 계절은 이미 늦가을쯤으로 접어든 듯이 보인다. 털실로 짠 재킷을 입은 여인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흑백이어서 구별이 안 되지만, 어머니 할머니들이 입던 이 재킷은 대부분 누런색이나 밤색으로, 유행이었다고 할 만큼 흔하게들 입었었다. 완전 겨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남자들 복장인데, 대체로 가을이나 초겨울에 입을 만한, 그런 잠바 같은 것들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늦가을임을 증명하는 더욱 결정적인 단서가 가게 앞에 놓인 멍석들과 자루들이다. 물론 곡물시장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득그득한 모양이 영락없이 추수를 방금 끝낸 늦가을 풍경임을 암시한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저 너머의 인천 풍경, 인천 수인역의 그나마 풍요로운 가을 경치였다.

 

이 사진을 통해 지금은 사라진 또 하나의 풍속화를 떠올려 본다. 다름 아닌 여성들의 머릿수건이다. 용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성 한두 명의 모습도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 여자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이 인천에서 생긴, 인천만의 풍습이었는지, 그러다가 전국으로 번져나간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고일(高逸) 선생이나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는 일제 때 정미소 선미공(選米工) 여인들이 머리에 썼던 것으로 저서(著書)에 적고 있다. 선미 여공들이 매일 아침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정미소가 밀집한 중구 신흥동, 사동 쪽으로 가기 위해 긴담모퉁이길을 메웠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남기고 있다.

 

수건을 썼던 것은 머리카락이 쌀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는 위생 관념 외에도, 정미할 때 발생하는 곡물 분진으로부터 여인들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집에서도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부엌 출입을 하실 때는 머리에 꼭 수건을 쓰시던 기억이 난다. 나이든 여성들이라면 필수품처럼 누구나 머리에 자신만의 수건을 썼었다. 오늘날은 수건이 아니라 디자인이 아름다운 머리띠나 모자형이 주종을 이룬다. 세월의 변화일 것이다.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진을 살펴보면 오른쪽 창고 건물 앞쪽에 뭔가 좀 특이한 장사꾼이 와 앉았는지 모르겠다. 그 곁에 쭈그리고 흥정하는 듯한 사람, 그냥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 물지게를 지고 뒷전에서 들여다보는 사람 등등 남녀 인파가 제법 몰려 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흥미로운 볼거리나, 혹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 장수였던 모양이다.

 

코흘리개 아이들 서넛은 아예 어른들로부터 밀려났는지, 아니면 그들 꼬마들에게는 별스럽게 흥미를 끄는 일이 아니어서 스스로 자청해서 돌아 나왔는지 어른들 뒷전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철길 앞쪽으로 중학생인 듯한 소년 하나도 사진사를 바라본다.

 

이제는 이 일대가 완전히 바뀌어 짐작을 하기도 어렵다. 수인역은 본래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그 뒤쪽은 바다였는데 전부 매립이 되어 연안부두까지 광활한 육지가 되었으니 알 턱이 없다. 사진 왼쪽 상단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 흐릿한 스카이라인 부분이 도원동 피난민촌이어서 가까스로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 풍경이라면 연안부두를 향해 가는 길 좌측으로 참기름집이 몇 채 죽 늘어서 있고, 철길을 따라서는 영양탕집, 정통은 아니지만 몇 군데 복집들, 미용실, 그리고 옛날 창고 건물 등이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진 속 건물이나 집들은 진즉에 사라졌고, 저 꼬마들을 제외하고는 상인들도 아주머니들도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세상은 세월 따라 바뀌는 것이 이치이지만 옛 사진을 보면 마음은 사뭇 옛날에 붙들리게 된다.

 

그때, 그 가슴 좁은 작은 기차, 협궤철도를 달리던 꼬마열차는 왜 그런지 슬픈 감정을 우리에게 주었다. 인천에 산 사람, 수원에 산 사람, 그리고 수원에 이르는 그 수인선 길에 산 사람들은 그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그것을 몇 해 전 어느 지면에 이렇게 덤덤한 듯이 썼었다.

 

그 시절 수원에서 달려온 두서너 칸짜리 꼬마 열차는 이곳 수인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피로도 더위도 잊은 채, 그러나 숨은 턱에 치받쳐서 왜애액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이제 다 왔다고. 이제 곧 마지막 종점 수인역에 닿을 거라고. 할아버지, 아저씨, 아낙네, 마나님, 그리고 다리가 묶인 닭들도, 돼지새끼도, 쌀자루, 참깨보퉁이, 콩깍지, 참빗, 담뱃대도 내릴 준비를 하라고.”

 

그때 그 정경이 참으로 아련하고, 슬프다. 추억은 결코 산문(散文)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인천 사람들은 느낀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썼다.

 

기차가 다니기는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철길과 집들이 닿을 듯 가까이 있을 수 있으랴. 가는 빗줄기 때문에 마음까지도 사뭇 눅눅해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협궤 선로는 아니지만 제 소임을 잃은 채 휘움하게 구부러져 돌아가는 녹슨 기찻길이 오히려 정겹다.

 

그렇게 번창했고 부산했던 이곳 일대가 이제는 인천시내에서 가장 조용한 변두리가 되었다. 허술한 만복 미용실과 영양탕집과 복집이 이곳을 한 10년은 뒤로 돌아가게 했다. 그렇다. 낡은 벽돌 창고 건물처럼, 이 골목이 이제는 한없이 느리고 한가롭고 너그러운 어느 소도시의 얼굴로 착하게 서 있는 것이다.

 

기차는 언제 다시 올까. 수인선이 다시 열리면 기차는 이쪽으로 오는 걸까. 옛날처럼 장이 서고, 사람 부대끼고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릴까. 인천의 얼굴이여. 오늘 비에 젖고 있는 향수의 시().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 사진=황경진기자 ssky0312@i-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