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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경인철도

by 형과니 2023. 6. 14.

경인철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10-11 23:03:49

 

경인철도 개통당시의 인천역

 

 

경인철도는 1897329일 기공되어 1899918일 오전 9시에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다. 경인철도의 완공으로 육로로 12시간이나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가 1시간 정도로 줄어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모하였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서울과 인천 간의 왕래는 경인도로와 인천용산 간의 항로를 이용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당시 경인도로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육로보다는 인천용산 간 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경인철도의 기공과 완공에는 조선이 처한 경제적 질곡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이중성이 교차되고 있다. 재정 상태가 열악했던 조선정부는 자체적으로 철도를 놓을 만한 여력이 없어 외국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인철도부설권을 처음 획득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1894년 경인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어 18963월에 이를 미국인 모오스에게 넘겼다. 그러나 모오스는 자금이 부족한데다 철도 부지 문제로 일본인 지주와 갈등을 빚게 되어 결국 1899131, 일본이 구성한 경인철도인수조합에 경인철도부설권을 완전히 넘겼다.

 

일본은 인수조합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나머지 공사를 재개하여 18999월 인천과 노량진 사이를 운행하는 경인철도의 임시영업을 시작하였다. 190075일에 한강철교가 준공되었고 78, 노량진서울(당시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철도의 시발역은 처음에는 탁포(신포동)를 매립하여 이곳에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철도 부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과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현재의 인천역으로 결정하고 전환국(인천여고자리였던 현 중구문화원 자리)과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는 선로로 변경하였다.

 

개통 당시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 화차 28량으로 운행되었으며 인천역축현역우각동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역을 두었다. 경인철도의 길이는 총 33.2였고,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였으며 오전, 오후 하루 2차례씩 왕복했다. 하루에 2번 왕복 운행하던 것을 121일부터 하루 3번 왕복으로 증차하고 이듬해 316일 부터는 4번 왕복으로 증차했다가, 경인철도 전구간의 개통과 동시에 5번 왕복으로 증차하였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설치된 우각동역(도원동)19064월 폐지되었다. 축현역은 현재의 청과물시장 부근에 있었으나 선로 변경으로 190812월에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신축 이전되었고 1926425일에 상인천역으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요금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요금은 일반 서민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등 객실의 요금은 150전으로 외국인과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2등실은 80전으로 형편이 그래도 나은 내국인이, 그리고 3등실 요금은 40전으로 여성과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의 물가 시세로 환산해 보면 면포 한필 값이 1원으로 1등실 요금보다 더 쌌고, 2등실 객실 요금은 계란 100, 3등실 요금은 닭 두 마리의 값어치와 같았다고 한다.

 

경인선 개통 이후 인천에서 활동하던 많은 외국인들이 서울로 옮겨갔고, 정치, 외교, 경제의 중심이 서울로 이동되었다. 1901821일에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경인철도는 19031030, 경부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어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