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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창영동 철도 건널목

by 형과니 2023. 6. 14.

창영동 철도 건널목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9-15 11:47:31

 

기차 지날때마다 붉은 깃발 흔들며 "통행금지"

<김윤식의 인천산책> 9. 창영동 철도 건널목

 

"그 무렵 인천은 전후(戰後)의 복구와 함께 인구가 팽창하면서 시가지가 차츰 도원동, 숭의동, 도화동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인천역에서 물산회사 길(참외전거리)을 거쳐 배다리, 그리고 황굴고개에 이르는 대로(大路)는 시의 중심지인 중구, 동구와 이들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가 된 것이다.

 

창영국민학교 앞길에서 배다리를 지나 중앙시장으로 연결되는 길은 이를테면 그 대로의 이면도로(裏面道路)로서 역시 인천에서 가장 요긴한 교통 루트의 구실을 했다. 이 길은 쇠뿔고개를 통해, 마찬가지로 도원동,숭의동, 도화동과 연결되었다. 그 길 중간쯤, 창영학교를 막 지나 영화학교 조금 못미처쯤에 뚫린 철도차단기가 있던 샛길은 앞서 말한 대로와 도원동에서 이어졌다. 이 이면도로는 매우 활기찬 길이었다.

 

특히 이 두 길 양쪽과 중앙시장, 사라진 배다리 일대 시장은 인천 사람들이 입을 옷가지와 인천 사람들이 쓸 각종 일용잡화, 생필품, 음식료품은 물론 과일, 채소, 농사용 종묘(種苗), 그리고 죽세공품, 널판, 유리, 지붕 함석 같은 건축 자재의 집산(集散)지 노릇을 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인천 경제의 한 중심축으로 중구의 신포동이나 경동 못지않은 번화가였다."

 

 

이 인용문은 해 전에 있었던 배다리 살리기 시민모임 세미나자리에서 발표했던 배다리에 관한 몇 가지의 기억들이란 글의 일부이다. 이렇게 길게 인용한 것은 글 가운데 나오는 창영학교를 막 지나 영화학교 조금 못미처쯤에 뚫린 철도차단기가 있던 샛길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게재한 사진이 바로 옛날 창영동 철도 건널목 풍경을 보여준다.

 

지금은 철도 차단기도 자동화되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기차가 지날 때마다 간수가 붉은 깃발을 흔들며 수동으로 차단기를 내려 인마(人馬)의 통행을 막았다. 그 차단 장대가 좌우에 한 쌍씩 사선(斜線)으로 들려져 있는 광경이 보인다.

 

이 길은, 앞의 인용문에서도 언급한 대로, 당시 시세가 점차 남구 일대로 확장되면서 인천 시내 통행의 요충이 되는데, 인근의 중앙시장, 그리고 평화의원 앞 공터의 배다리시장, 창영학교 앞길의 잡화상들과 헌책방거리에 닿는 출입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심리가 그랬는지, 동인천 지역에서 도원동이나 숭의동으로 가려면 으레 인현동 채미전거리에서 배다리 철로문다리 밑의 창영파출소를 지나 쇠뿔고개길로 들어선 다음, 이 건널목을 통해 다시 도원동 방면으로 나와 황굴고개길로 올라서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동인천을 출발할 때부터 화평동 굴다리에서 중앙시장으로 진입해 배다리를 거쳐 쇠뿔고개길로 통행하기도 했다.

 

직선으로 동인천에서 도원동 황굴고개로 통하는 대로가 있는데도 굳이 배다리에서부터 창영학교 앞을 통과하는 우회 코스를 택했던 데는 가난했지만 이 거리에 넘친 활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전쟁의 파괴와 공포로부터 벗어나 이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런 활기와 활력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추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경인선이 복선(複線)인 것으로 보아 사진이 찍힌 때는 1964년 이후가 될 것이다. 경인선 복선이 완공된 때가 19649월이기 때문이다. 사진 속 시대는 짐작컨대 1960년대 중후반 무렵이 아닐까 싶다. 1960년대라고 해야 아직 국민소득 100불이 채 되지 않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건널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상당히 활기가 있어 보인다.

 

사진 속 시간은 대체로 아침 시간일 것으로 판단된다. 행인이나 건물의 그림자가 길게 왼쪽으로 누웠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도원동 큰길 쪽에서 창영학교 방향을 보고 찍은 것이니까 사진의 오른쪽이 동쪽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겨울을 막 지낸 봄인지, 아니면 이제 가을 지나 머지않아 겨울로 가는 시기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가방을 들거나 어깨에 멘 국민 학교 학생들이 보이고, 중학생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등교 길임을 알 수 있다.여러 성인 남녀들도 각각 일터로 향하는 것일 게다. 사진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붙잡는 사람은 아무래도 오른쪽 전면의 젊은 하이칼라 신사이다.

 

첫 출근 날인지 그는 단정한 머리 스타일과 함께 구두, 양복, 그리고 넥타이까지 아주 말쑥하게 차림을 했다. 그 두어 걸음 뒤에 오른발 뒤 바짓가랑이를 만지는 듯한 중학생은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이 눈길을 끈다. 1950년대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농구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건을 머리에 쓴 나이 많은 여인의 복색이나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여인 역시 그다지 화려하거나 윤택하다고 할 수 없는 한복들을 입고 있지만 휴전 직후처럼 그렇게 파리하고 궁색해 보이지는 않는다.

 

궁금하고 신기한 듯 이 사진을 찍는 사진사를 쳐다보는 처녀애의 복장도 역시 몹시 남루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진 정중앙의 흰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람과 양복을 입은 또 다른 남자의 뒷모습에서도 하루 시작의 힘차고 밝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들이 걷는 방향 왼편 앞 위쪽에 희미하게 형제상회라고 내려쓴 간판이 보이는데 그 부근에 있는 골목입구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꿀꿀이죽 골목이 입구였다.

 

시대가 1960년대 중반 이후라면, 아마 꿀꿀이죽 장수들은 거의 폐업을 하거나 전업을 했을 무렵이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 시기를 전후해 행정관서에서 나서서 꿀꿀이죽 판매 금지를 본격적으로 계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꿀꿀이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거나 경험담을 이야기해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혹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참고적으로 적어 본다.

 

꿀꿀이죽은 미군의 잔반(殘飯)이었다. 쉽게 말하면 미군들이 먹다 남긴 세 끼 식사의 찌꺼기를 모은 것이다. 휴전 후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의 쓰레기 처리나 미군 병사들이 남긴 잔반을 치우는 일을 한국인이 맡아 처리했는데 그 처리 과정에서 나온 잔반을 돼지 같은 가축의 사료로 쓰는 대신 우리가 먹으면서 생긴 음식(?) 이름이 꿀꿀이죽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그 시절 우리의 생존이 그만큼 절박했고 힘들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굶는 마당에 축생을 먼저 먹일수는 없는 일. 해서 전쟁 직후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목숨을 연명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거저 얻어먹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기가 막힌, 봉이 김선달 식 상술이 이 외국 군인들의 침 묻은 음식 쓰레기를 상품으로 변모시켜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한국인에 대한 아니꼽고 한 맺히는 모습은 참으로 필설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미군 영내에서 나온 잔반 중에 제법 부피가 있는 고기류는 한국인 손에 걸러진 뒤에야 일반에게 팔려나간다. 그리고 그것의 일부가 여기 창영동 골목에 도달해서는 어엿한 미제 육류로 둔갑해 팔리는 것이다.

 

물론 꿀꿀이죽은 더 할 수 없이 멀건 국물로 변해 소매가 되고. 그것을 막일꾼, 노무자, 지게꾼 같은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 찾았다. 그런 전문점(?)들이 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 이 건널목을 떠날 시간이 온 듯하다. 서둘러 사진 설명을 마저 하자. 사진 왼쪽 윗부분에 멀리 아취형 교문과 2층의 긴 교사(校舍)가 창영국민학교 본관이다.

 

오른쪽 중간 상부에 지붕만 보이는 것이 지금 존스 목사 기념관이 된 영화학교 건물이고 그 오른쪽 옆에 역시 흐릿하게 지붕 부분만 보이는 건물이 기독교사회관이다.

 

거리는 죽고 암울한 적막만 감돈다. 그저 말없이 옛 시절을 추억하며 서 있는 것은 이들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이 건널목조차도 막혀 통행할 수 없다. 그 자리엔 통행인도 별로 없는 육교가 덩그러니 서 있다. 꿀꿀이죽 골목도, 내왕하던 그 시절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도 사진을 들여다보면 솟구쳐 오르는 그 시절 감회를 억누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