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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시계탑·키네마극장 … 사진 속 그 시절 추억 아련

by 형과니 2023. 6. 14.

시계탑·키네마극장 사진 속 그 시절 추억 아련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8-09 15:33:09

 

시계탑·키네마극장 사진 속 그 시절 추억 아련

7. 중구 신생동

 

 

1983년에 인천시에서 펴낸 사진으로 본 인천 개항 100을 들추다가 문득 신생동 일대 풍경에 눈이 갔다. 신생동은 청소년 시절 무슨 본거지처럼 거의 매일 이 일대를 쏘다니던 곳이다. 거기에 1970년대 중반 한때 거주했던 적도 있으니 아마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낯익은 거리 풍경에 가 머물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진 속의 풍경은 그것이 1960~7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더욱 빨려 들어간다. 첫 사진은 신흥동 쪽에서 바라본 답동로터리와 신생동 대로변 풍경이다. 답동로터리 시계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남았을까. 사진 속의 시계 바늘은 낮 두시 십칠 분쯤을 가리키고 있다. 이 양면 시계탑은 당시 라이온스클럽에서 세웠는데 로터리 한복판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그 발밑은 하수 시설도, 도로 포장도 안 돼 있어 질척질척 물이 고여 있다. 필시 저 흙탕물은 며칠 전에 내린 비 탓일 것이다. 이 일대는 갯가였기 때문에 지표(地表) 밑은 온통 뻘흙이어서 빗물이 며칠을 가도 영 잘 빠지지 않는다.

 

이 무렵은 인천 인구가 50만 명을 넘어선 시절인데도 번화가의 하나인 신생동 일대의 사진 속 풍경은 오히려 고요하고 한적한 느낌이다. 거리에 택시나 다른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고, 오직 단조로운 색채에 맹꽁이처럼 생긴 버스 한 대가 동인천 쪽에서 출발해 온 것인지 사동 쪽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버스가 지나간 뒤를 한 가장(家長)이 어린 두 딸을 양손에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멀리 인천우체국 방향에도 사람들이 차도, 인도 구별이 없이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운행하는 차량이 없으니 굳이 인도로 걸을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제대로 도로포장이 되어 있어야 차선이나 횡단보도 같은 표시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였는지 1961, 중학교 2학년 때는 소년단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아침 등교 전 1시간, 그리고 방과 후 1시간씩 시내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 신호를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경인일보 인천본사 박영복사장이 그때 같은 소년단원이었다.

 

사진 속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지금의 대한투자신탁회사 건물인데 광복 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를 거쳐 한전인천지점(韓電仁川支店) 사옥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에서는 제법 높은 고층 건물에 속했다. 한전 건물 지나 우체국 방향으로 15~ 16년 전까지 유명한 신경과의원이 있었던 건물에 이어 옛 공보관도 보인다.

 

 

사진 속에는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현수막이 길게 늘여져 있다. 여기서 만나던 선배 문인들, 화가들 모습이 떠오른다. 1966년에 문협지부장을 하신 고 최병구(崔炳九) 선생과 손설향(孫雪鄕) 사무국장을 따라 처음 문협 사무실을 들어가 보았다. 두 분 다 시만 쓰시고 생활은 돌보지 않았지만, 평생 주위에 베푼 인정(人情)만큼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만큼 곱고 아름다웠던 분들이었다. 공보관에서는 그해 해일문학동인과 제3문학동인이란 것을 만들어 주로 여학생 상대의 문학의 밤을 열기도 했다.

 

길 건너에는 현재 외환은행인천지점 사옥이 된 옛 키네마극장 건물이 있고 그 조금 떨어져 사진 맨 오른쪽 끝에 경기매일 사옥이었던 국제빌딩이 높다랗게 보인다. 5층 건물은 1962년에 신축되었을 것이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뒤로 1층에는 빌딩 이름을 딴 레스토랑 국제경양식이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미각을 사로 잡았었다. 사장 김종성 씨는 미 해군에서 양식 요리를 했던 경험을 살려 정통 스테이크를 내놓았는데 인천 최고의 서양요리로 식도락가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다. 10여 년 전 좀 더 아늑한 곳을 찾아 선화동으로 이사했다.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 한 번 데려가셔서 그 맛있는 스테이크를 사주신 적이 있다.

 

그 달콤한 추억 말고도 무지한 혀를 일깨워 주신 일도 있다. 한번은 박사께서 물 좋은 가자미를 신포시장에서 구하셔서는 김 사장네 주방에서 프라이를 하도록 하셨는데, 생선튀김의 진미를 그때 비로소 맛보았던 듯싶다. 올리브유로 적당히 튀겨낸 가자미 살에 레몬즙을 뿌려 먹는 맛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향취와 맛을 지니고 있었다. 올리브유가 몸에 바르는 것뿐만 아니라 식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이런 굉장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어찌어찌 어른 곁에 끼어 앉을 수 있었던 행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경기매일 윤전기가 돌아가던 지하에는 역시 빌딩 이름을 옮겨다 붙인 국제다방이 30년이 넘어 오늘까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다. 화가 우문국 선생, 서예가 김인홍 선생, 시인 한상억 선생, 수필가 김길봉 선생, 소설가 김창황, 심창화, 이정태 선생 등과 우리 같은 젊은 층들이 툭하면 가 앉던 다방이다. 그 당시 벽에는 인천 화가들의 그림 몇 작품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다 떼어지고 없다. 사람이나 다방이나 모두 시절에 밀려 가느다란 숨만 쉬고 있다고 할까.

 

키네마 극장은 그 안쪽 골목의 동방극장과 함께 외화 개봉관으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티브이가 거의 전 가정에 보급되면서 영화관이 쇠퇴기로 접어들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극장이 다 문을 닫고 말았다. 1970년대 중후반 무렵일 것 같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이곳은 울긋불긋 명멸하는 네온사인에, 선정적인 극장 포스터, 간판 등으로 특히 젊은 또래를 유혹하던 그야말로 인천의 최첨단 유흥 지대였다.

 

이런 곳에는 음침한 음지식물이 돋게 마련인지 이 일대에는 특이하게도 남색(男色)을 하는 사람들이 흔했다. 히치콕 감독의 라는 영화를 보다가 그런 사내의 접근에 혼비백산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영화 1963년 작품이지만 이 극장 영사기에 걸린 것은 전 세계를 돌고 돌아 몇 해가 지난 뒤였다.

 

키네마 극장이 개봉관에서 재상영관으로 격이 떨어진 후이니까 1970년대 초중반일 듯싶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날 마지막 상영을 보게 되었다. 극장 안에는 불과 스물이 채 못 되는 관객이 앉은 정도였다. 영화 자체가 워낙 공포스러운 데다가 극장 안마저 썰렁하니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영화에 열중해 있었던 터라 웬 사내가 접근하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슬며시 내 무릎에 손을 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던 것이다. 사내는 근처에서 자주 보던 그렇고 그런 인물이었다. 사내가 떨어져 나가고도 영 기분이 상해 그만 극장을 나오고 말았다.

 

또 다른 사진 속에는 반가운 풍경이 들어 있다. 오른쪽 전면에 있는 공립병원 간판이 그것이다. 이 병원 원장이 우리 인천으로서는 기억해야 할 분으로 고 이종화(李宗和) 선생이시다. 선생은 의사라는 직업외에도 사진작가로 활동하셨는데 1950년대 말 무렵의 문학산 모습을 사진집 문학산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선생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문학산의 배꼽을 사진 속에서나마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烽燧臺)의 볼록했던 형상은 미군의 군사기지가 되면서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밖에도 1962년 인천예총 결성 당시 초대 회장을 맡아 예총 발전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공립병원에서 우체국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면 옛 중구청의 흰색이 칠해진 건물 모서리가 보이고, 조금 더 아래에 흐릿하게 서울은행 입간판도 보인다. 중구청은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던 1980년대 초반, 시청이었던 현 중구청 청사로 이전하기 까지 약 14년간 이 자리에 있었다. 서울은행 뒤쪽은 70년대 초반까지도 휑한 공터였다. 이 은행은 후에 서울 신탁은행으로 합병됐다가 다시 하나은행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신생동 거리 풍경을 보면서 30, 40년이 이렇게 짧게 지나는 시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덜 변한 시가지 풍경이 있다 해도 그 시절 사람들 음성은 들을 수 없다. 이렇게 속절없이 변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인가.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