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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낯선 물텀벙이탕에 소주 한잔 밑바닥 고달픈 인생 위로하네

by 형과니 2023. 6. 14.

낯선 물텀벙이탕에 소주 한잔 밑바닥 고달픈 인생 위로하네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7-24 14:04:12

 

낯선 물텀벙이탕에 소주 한잔 밑바닥 고달픈 인생 위로하네

5. 음식·음식점

 

음식과 음식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러 해 전 시내 모 일간지에서 발행하던 일종의 주간지 성격의 지면에 1950~60년대 인천 이야기 중 한 가지로 전쟁과 꿀꿀이죽이란 글을 썼던 일이 생각난다. 먹고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 우리가 먹었던 그야말로 참담한 음식이야기였다.

 

이번에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야말로 우리들이 연명(延命)을 위해 먹었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이 또한 1950년대 빼 놓을 수 없는 인천 사회 풍경의 하나일 것이다.

 

연명을 위해 먹었다는 표현에서는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아주 절박한 뉘앙스가 풍긴다. 더불어 음식이라는 말에서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온다. 그렇다. 거기에는 이것이 과연 인간의 음식인가 하는 자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극도로 피폐했던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먹고 죽을식량조차 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돼지나 개밥이 되어야 할 것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흔히 말하는 꿀꿀이죽이었다.”

 

이것이 그 글의 서두 부분이지만, 그때 이 글을 쓰면서는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깊이 빠졌었다. 생명이 붙어 있으니 먹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가, 먹고 살아 남아 구차한 생명이라도 더 길게 부지해야 하는가. 아무튼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것이다. 50년대가 지나고 6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우리의 자존심이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식량 사정이 다소 나아졌던 때문인지, 미군의 침 묻은 잔반, 꿀꿀이죽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이런 상황에서나마 인천은--여기서 태어난 것을 진정 고맙고 행복하게 생각한다--바다가 열려 있어서 먹을 것을 구하기가 그래도 수월한 편이었다. 우선 괭이부리나 만석동, 북성동 해안가에서 망둥이 낚시를 할 수가 있고, 바지락 동죽을 캘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는 송도, 동막 쪽으로도 원정을 가서 고둥과 맛살, 상업살 같은 조개들을 긁어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래지 않아 어촌계가 나서서 이 같은 무단 어렵 채취를 단호히 금지시키기는 했지만.

 

50년대 중반 숭의동으로 이사를 해서는 일요일이면 검누른 막 밀가루 개떡을 점심 요기로 싸들고 온 식구가 호미와 바구니, 혹은 푸대 자루를 둘러메고 송도로 나가는 게 일이었다. 개흙 구멍에 쇠꼬챙이를 넣어 맛 조개를 하나씩 하나씩 기술적으로 꺼내시던 어머니 모습, 끔찍하게도 물에 빠진 송장에 고둥이 새카맣게 둘러붙어 있는 걸 본적이 있다고 말하던 형의 얼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미어지는 일은 삽시에 등 뒤로 밀어닥친 밀물에 아이를 잃고 통곡하던 한 어머니의 비통한 얼굴이 떠오른다. 사리 때 물살은 빠르고 세서 물이 멀리 있는 듯이 보이다가도 삽시간에 갯골을 타고 빙 둘러싸 고립시키고 만다. 아이는 정신없이 조개를 줍다가 변을 당했으리라.

 

각설하고, 이번에는 1960년대 하인천 일대에 흔하던 먹을거리 물텀벙이탕 이야기부터 하자. 생선 귀신이라고 불리는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물텀벙을 앙꼬(鮟鱇)라 하여 부위별로 나눠 칠미(七味)를 즐긴다고 하지만, 사실 인천 사람들은 이 무렵까지도 물텀벙의 맛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물텀벙이라는 어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옛날부터 인천 앞바다는 한강의 민물이 흘러와 섞이는 곳이어서 어족 자원이 풍부했다. 그리고 서해 인근의 도서지방은 최고의 어장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인천 근해의 농어, 숭어, 준치는 물론 덕적도 인근 어장의 민어, 연평도의 조기, 백령, 대청 등지의 도미, 가자미, 넙치, 가오리 등 온갖 어류가 풍성한 그런 어장이었다.

 

한 마디로 그 전까지는 물텀벙은 어업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까지는 우럭이나 바다뱀장어, 망둥이 따위는 어물로 치지도 않을 때였으니 그보다 더 낯선 물텀벙은 아예 잡지도 않았던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물에 이것이 걸리면 재수 없다고 도로 바다에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어류가 물텀벙이였다. 생기기도 어지간히 귀물(鬼物)처럼 생겼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

 

석양 무렵 간혹 부두에서 청관을 거쳐 신포동으로 넘어오는 노무자들 손에 이 물텀벙이 끌려오는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물텀벙은 삐삐선이라고 불리던 전화선 동강이나 새끼줄에 주둥이가 꿰인 채 온몸을 출렁거렸다. 흐물흐물 하는 것이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몸인지 정말이지 구별하기 어려운 흉물의 모습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인천 사람들이 물텀벙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알지 못하니 요리법이 있을 리 없고, 철따라 풍부한 조기, 준치, 민어, 갈치, 가자미 같은 생선에만 입맛이 끌렸던 까닭에 물텀벙의 맛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것이 인천항 연안부두의 막벌이 노동자들, 지게꾼, 구루마꾼의 요깃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는 연안부두와 경기도어업조합 공판장이 인천역 서쪽, 지금의 인천항 8부두 자리에 있었다. 4·19, 5·16을 거쳐 어쨌든 사회가 안정의 길을 가고, 아직 소규모 어선일망정 어업에 전념하면서 인천항 연안부두도 어느 정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거리를 찾아 어부, 노무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을 따라 하인천역 일대는 됫병소주와 막걸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진을 친 것이다.

 

여기서 대포 한잔에 딸려 요깃거리로 내놓기 시작한 것이 물텀벙이탕이었다. 노점상들은 죽 늘어서서 드럼통을 말러 만든, 번철 비슷한 입이 넓은 냄비에 빨갛게 고춧가루 양념을 해서 물텀벙이탕을 끓였다. 그 무렵 처음 먹어 본 물텀벙이탕은 그저 그런 요깃거리였지 다른 생선탕에서 느껴지는 그런 깊은 미각은 없었다. 어폐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 물텀벙을 말하라면, 그저 밑바닥 고달픈 인생이 요기하던 하치 음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다.

 

물텀벙이 오늘날 그토록 귀족 음식이 된 내력은 알지 못하나, 신포동 쪽으로 진출한 역사는 대충 기억하고 있다. 하인천역 노점상에 이어 물텀벙 간판이 그 일대 판잣집 여러 곳에 붙게 되고, 이어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비로소 중구 신포동 쪽으로도 진출한다. 그러니까 이 무렵에 와서 물텀벙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포동 방면에서의 효시가 되는 곳이 중구 신생동 옛 농협 자리(지금은 나이키 운동복 가게가 되었다)에서 노부부가 경영하던 영화주점이라는 막걸리집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물텀벙이탕은 지게꾼 엿장수, 행상, 가난한 대학생이나 먹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든 먹을거리의 중심이었던 신포동 일대에 영화주점 외에는 더 이상 물텀벙을 내놓는 점포가 생겨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를 무렵 영화주점이 문을 닿고, 그 얼마 후 하필이면 용현동 로터리에 몇몇 물텀벙집이 문을 열면서 마치 원조(元祖) 경쟁을 하듯 되어 버렸다. 그러나 첨가물은 늘었으나 맛은 옛날에 비해 그다지 진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인천에 물텀벙이 퍼진 것은 아마 우리가 즐기던 기존의 고급 어족 자원의 고갈이 그때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것은 곧 흔한 물텀벙 어획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말이 된다. 거기에 물텀벙이 일본에 수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전파(傳播)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7미의 으뜸으로 꼽는다는 물텀벙의 간과 위는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하고 우리는 텅 빈 몸통만 먹어야 했다.

 

순전한 인천 음식이라고 고집할 수는 없지만, 물텀벙을 탕으로 개발해 낸 고장은 우리 인천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인천은 과거 일제 때부터 민어 서덜이탕을 끓여 서울은 물론 전국의 한량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명성 높은 생선 매운탕의 고장이었으니 말이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