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 공연한데~" 인산인해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7-24 14:09:25
"연예인들 공연한데~" 인산인해
6. 그 시절의 축제
오늘날엔 지역 축제가 곳곳에서 어찌나 많이 열리는지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시끄럽고 귀찮은 애물단지처럼 느껴진다. 지자체 간판이 걸린 곳이면 일 년에 몇 차례씩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경쟁적으로 뿡빵거리고 쿵쾅대니 그럴 만도 하다. 노래자랑이나 무슨 장기 시합 비슷한 내용에 바가지나 씌우는 음식물 장사꾼뿐이라니! 지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정서와 특성이 담긴, 지역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잔치요, 의식(儀式)일 터인데 오늘날 대부분 축제가 이 지경이 되었다.
이것을 오늘날의 축제 개념에 꼭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아마 인천 최초의 축제형 행사라면 지금으로부터 꼭 51년 전인 1959년 7월 4~ 5일 양일간 인천 시민관에서 열린 ‘제1회 인천출신영화인 귀향예술제’일 것이다. 이 예술제는 ‘당시 인천의 언론사였던 경인일보사’가 특별 기획한 행사였다. 물론 여기의 경인일보사는 오늘날의 경인일보사와는 다른, 본사를 인천에 두었던 별개의 신문사이다.
이 영화인 귀향예술제는 주최자인 경인일보사의 사고(社告)대로 “메마른 서정의 사회를 일시나마 낭만 속에 이끌어 보려는 의도와 6·25 9주년 행사의 일단으로~” 기획된 행사였으니 축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기획 공연 성격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상당수 시민이 목매어 그 행사를 기다렸고,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어 박수를 치고 흥겨워했던 것만으로도 오늘날의 연예인의 특정한 개념의 리사이틀 같은 행사나 어설픈 지역 축제들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틀간에 걸쳐 치러진 이 영화인예술제의 출연자는 모두가 인천 출신 아니면 인천 연고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배우로는 황정순, 도금봉, 후라이 보이, 장동휘, 양석천, 오길래, 전방일, 차석종, 황해남, 장세진 등과 박경원, 남 신, 윤일로 등의 가수와 당영화감독 조정호, 신현호, 박성복, 그리고 촬영 담당 원용일, 제작자 공병두, 무용수 나복희 등이 고향 무대에 섰던 것이다. 이들 모두 한국의 정상급 영화인들이었는데 인천 무대에서 축제를 가지게 된 데 대한 변(辯)을 “향토를 아끼고 고향에 대한 구정(舊情)을 소중히 여겨 자진 협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 해 전 모 일간지에 쓴 적도 있지만, 영화학교와 창영학교에서 수학한 인천 출신 여배우 황정순은 한국의 단아한 ‘규수상(閨秀像)’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85세 고령임에도 작년에는 ‘배다리 살리기 시민 모임’ 행사에 다녀갔다. 처음 악극단원 생활을 할 때 지일화(池一花)라는 예명으로 인기를 끌었던 이른바 ‘요화(妖花) 도금봉’은 작년 6월에 우리 나이 수(壽) 팔십으로 타계했다. 1950~60년대 은막을 풍미한 여배우 고 도금봉(본명 정옥순)씨가 인천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밖에 예술제 멤버로는 코미디언이면서 명 사회자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성격 배우 장동휘, 뚱뚱이 양훈과 함께 코미디언 최고의 흥행카드였던 홀쭉이 양석천, 그리고 영화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단종 역으로 나와 스타덤에 오른 황해남 등은 모두 당대의 최고 인기인들이었다. 거기에 ‘이별의 인천항’을 부른 중구 신포동 출신의 박경원과 ‘기타부기’로 전국을 강타한 윤일로 역시 인기 절정의 가수였다.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서 인천 시민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더불어 구수한 회고담을 펼친 그 이틀간의 ‘축제’는 6·25전쟁 후 오직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 없던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한 다시없는 위안거리였다.
아무튼 이 영화인귀향예술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국민학교 6학년생이던 나까지도 가보고 싶어 무척 안달을 했던, 많은 인천시민이 그야말로 걸(乞) 기대하던, 그런 만큼 끝나고서도 크게 화제를 모은 이벤트였다. 시민관에서 이 행사를 보고 온 형과 또 동네 형들의 들뜬 입담을 여러 날 두고 반복해 들을 수 있었다. 영화인귀향예술제가 개최되었던 시민관은 지금은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당시는 시내 다른 극장들처럼 영화를 상영하거나 악극단이 들어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워낙 재간이 많아서 가능했겠지만, 바로 위의 형이 어떻게 입장료를 마련했는지, 중학생 신분임에도 어떤 수단을 써서 입장을 했는지, 집안 식구들 몰래 관람하고 돌아와서는 늦은 밤까지 여배우 이름 등등을 내게 외우며 그 감상(感賞)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는 통에 적잖은 선망과 실망, 분통에 휩싸였었다.
더구나 거기 출연한 남자 배우 황해남은 숭의동 우리 동네에 있던 석유(石油)집 아들이라는 소문과, 그 잘생긴 얼굴을 얼마 전 극장 포스터에서도 보았기 때문에 기필코 가보고 싶었었던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서 시민관에 가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해 속으로 ‘나도 어서 1년이 지나 빨리 중학생이 되기’를 빌고 빌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시민관 못지않게 이런 ‘연예예술축제’가 당시에는 숭의공설운동장에서 종종 열리곤 했다. 영화인귀향예술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법한 행사가 아마 그보다 두 달 앞선 5월에 열렸던 ‘영화배우 야구단과 인천 문화인 팀 대항 시합’이거나 그 전 해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영화배우 팀과 인천 유지인사들과의 친선 배구 시합’이었을 것이다. 영화배우 배구팀 멤버였던 배우 고 황해 씨와 ‘나는 고발한다’의 악역 최봉 씨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주간인천사(週刊仁川社)가 주최한 이 야구 경기는 급조한 것이기는 했어도 인천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재미거리를 선사했을 성싶다. 인천 문화인 팀에는 얼핏, 고 신태범 박사와 문학평론가 김양수 씨의 성함이 눈에 띄어 반갑다. TV를 통해 요즘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모 연예인 야구팀의 활동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조상(祖上) 야구팀’이 이미 1959년 5월 인천에서 경기를 벌였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같은 ‘축제’는 1959년이 황금시절이었는지 그 해 한여름 밤에도 입장료 없이 공설운동장 육상장에서 한국 일류 가수들의 무대가 펼쳐졌다. 물론 가수가 서는 무대라야 어설픈 육상장 본부석이고 관객석은 운동장 맨땅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부르던 대히트곡 ‘노란 사쓰 입은 사나이’의 한명숙과 ‘청춘의 푸른 날개’를 불러 귀염을 독차지한 꾀꼬리 가수 박재란, 그리고 미남이면서 미성의 가수인 도미 등과 함께 하루 저녁 노래 부르는 것으로 행복할 뿐이었다. 주최자가 인천시였는지, 아니면 어느 한 신문사였는지, 뚜렷이 기억에는 없으나 이 역시 시민 위안 행사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날 밤 어둑어둑한 운동장에서 가수 도미가 부르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운운’ 하는 노래 가사를 입속으로 따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툭 치고 달아난 사건이었다. 인파 속으로 재빨리 사라진 사람은 그다지 썩 친하지 않았던 옆 반 여자애였다. 왜,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 후로도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그저 모른 척 했지만 어둠 속에서 날름 혀를 내밀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는 그 운동장도 사라지고, 또 그 옛날 같은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시민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던 반가운 ‘축제’도 다시 볼 수가 없다. 며칠 후 벌어질 팬타포트 록페스티벌을 어떻게 하면 진정한 우리 인천의 축제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깊이 생각할 문제다. 글=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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