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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4. 음식·음식점 中

by 형과니 2023. 6. 13.

4. 음식·음식점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6-27 21:02:51

 

인천에서의 외식 경험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4. 음식·음식점

 

인천 음식 상편의 냉면이야기를 매잡이하는 의미에서 최근 동구 화평동 일대에서 번창하고 있는 이른바 세숫대야 냉면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음식 이름을 세숫대야운운하며 부르는 것도 썩 마뜩치 않은 데다가, 그 내용물에 대해서도 크게 상찬(賞讚)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화평 철로문 다리에서 화도고개로 올라서는 야트막한 경사의 이 지역은 1960년대 무렵까지는 주로 솜틀집, 소규모 양복점, 잡화점, 밥집들이 뒤섞여 있던 곳이다. 그 이후에는 인쇄 골목으로 이름이 날 만큼 소규모 영세 인쇄업소가 한 집 건너에 문을 열고 있었다. 그 인쇄소 자리가 오늘날 모조리 세숫대야 냉면집이 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거리의 냉면은 1990년대 중반 무렵, 정식 냉면과는 고명이나 육수가 전혀 다른 냉면, 그러니까 삶은 달걀이나 소고기, 배 같은 고명 대신에 열무김치 한 가지만 넣고 육수도 간편하게 만든, 이른바 간이 냉면을 팔던 한 업소가 손님 유인책으로 무한 리필을 영업 방침으로 정하면서 손님을 끌자 삽시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상편에서 이야기한 정식 인천 냉면의 전통을 이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인천의 명물 음식으로 이미 고일(高逸) 선생은 1950년대 말에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냉면과 추어탕, 술국밥을 꼽았고, 신태범(愼兌範) 박사는 생전 저서 먹는 재미 사는 재미에서 냉면과 해장국 그리고 추탕을 내세웠었다. 고일 선생의 술국밥이나 신태범 박사의 해장국은 실상 같은 음식인데 명칭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그리고 추탕추어탕의 준말이니 그 또한 동일한 음식일 터이다.

 

추탕은 전국 어디서나, 또 누구나 먹어오던 미꾸라지국이었지만 역시 개항 이후 인천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에 따라 외식업소가 생겨나면서 메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미꾸라지는 전국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고, 영양이 많아 값싼 주막 음식의 대표격이었을 것이지만 인천에서 내용물의 보충과 함께 전문 외식 음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용동 김영덕 씨 댁 추탕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서울 형제주점' 추탕집은 김 씨 댁 역사보다 얕고, 또 그리 대단했던 것도 아니었다. 날만 추워지면 새벽부터 밤늦도록 이 집 문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추탕 한 뚝배기가 일금 5전인데, 별미인 이 집 추탕에는 버섯, 실백, 고기 등 20여 종의 양념 등이 미꾸라지 속에 끼어서 큼직한 가마솥을 무대로 삼아 왈츠를 추었었다. 지게꾼도 들어서고 상인과 신사도 줄에 끼어 구순하게 평화를 유지했다.”

 

이 글이 바로 추탕에 대한 고일 선생의 설명이다. 중구 용동 김영덕 씨 댁 추탕이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며, 서울의 유명 업소인 형제주점보다 역사가 깊을 뿐만 아니라 질도 좋았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연세가 좀 밑이었던 신 박사 역시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차츰 전문 추탕집이 많이 생겨나고 솜씨도 좋아졌는데 그 중에서 용동 추탕집이 제일 유명했다.

 

그 집 추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기름이 섞인 쇠고기와 곱창을 넣고 흠씬 끓인 것인데 곁들이로 느타리버섯, 고사리, 토란 줄거리, , 두부 등이 푸짐했고, 듬뿍 들어 있는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이 비린내를 없애 얼큰하고 구수한 맛을 돋우고 있어 일품이었다. 매운맛이 좀 강한 편이라 어린이와 부녀자들에게는 맞지 않았으나, 추운 겨울에 아침 일찍이 일터로 나가는 사람과 저녁때 술 생각이 나는 주객에게는 요깃거리와 안주거리 구실을 했다. 그 무렵에 서울 동대문 밖에 생긴 형제주점이 추탕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용동의 추탕집을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이 같은 추탕집들은 6·25 후 대부분 사라졌는데 전쟁으로 인한 산천의 피폐가 미꾸라지를 귀하게 했는지 모른다. 요즘에도 더러 추탕집이 보이기는 하나 옛 인천의 추탕과는 그 맛과 질에 있어서 거리가 멀다.

 

해장국은 1930년대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명성을 날렸다.

 

쇠뼈와 배추, 우거지를 밤새 끓여내는 토장국이 인천식 해장국이었는데 쇠뼈의 기름기와 재래식 된장이 어울려 풍기는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이 향수어린 토속적 미각을 느끼게 했다. 5()만 내면 막걸리 한 사발에 국이 한 뚝배기라 아침요기가 되고, 곱빼기를 시키거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찬밥 덩어리를 국에 말아 먹으면 충분한 아침끼니가 되었다.”

 

새벽이 되면 쌀장수나, 쌀 거간이거나, 객주집 주인이거나, 정미 직공이거나, 목도꾼, 지게꾼이거나 모두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간다. 술국(해장국) 냄새가 김에 서려 행인의 코를 찌르고 비위를 맞추면 회를 동하게 한다. 사람은 꽉 찼다. ‘한 잔, 주슈!’ 하면 으레 아침 해장 술국에 막걸리다. 한 사발 쭉 들이키고는 뜨끈뜨끈한 술국밥을 먹는 것이었다. 쇠뼈다귀에 고기가 흐들흐들 붙어있으면 뼈다귀를 핥고, 구수한 콩나물과 조갯살에 선지가 들어 있어 포식한다. 얼큰하고 배가 인왕산만 해진다. 5전 한 푼을 던지고 슬며시 나가는 사람은 모두 칠통마당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신 박사의 글이고, 뒤의 것은 고일 선생의 설명이지만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풍성하게 해장국을 끓일 수 있었던 것도 상편에서 언급한 대로 구미인과 선박 급식을 위해 필요한 소고기 외에 풍부했던 소뼈 같은 부산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다른 지역에는 이런 종류의 해장국이 아직 모양을 갖춰 출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소나마 여유가 생긴 근로자층과 자금을 가진 미두꾼이 음식점 등을 자극하여, 수효도 늘고 규모도 커지고 영업의 내용까지 향상시키게 되었다. 도펴처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아니나 근로자층은 아침 일찍이 일터로 나가는 관계로 해장국과 추탕을, 중매점(현재 증권회사 사무실과 같은)이나 여관방에 앉아서 점심을 드는 미두꾼은 냉면을 키워나갔다. 이래서 해장국, 추탕, 냉면이 번창했고, 더구나 그들은 모두가 고향을 따로 두고 찾아들어온 이동 인구였으므로 이 소문은 삽시간에 출신 각지로 퍼졌다. 다른 지방에는 아직도 외식 인구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음식점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으니 인천의 음식 소문은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신 박사의 설명으로써 인천이 한국 대중음식사(大衆飮食史)’에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장국, 추탕, 냉면을 인천이 정식 외식 메뉴로 개발하고, 더불어 내용물의 풍부와 미각의 질적 상승을 꾀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이 일반 대중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음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인천의 선도 업소들이 침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32년에 인천미두취인소가 폐쇄되고, 뒤이어 일제가 전시 경제 체제로 사회 규제를 강화하면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인천에서의 외식 경험은 광복과 한국 전쟁 이후, 국내 인구의 대이동과 함께 전국 각지에 본격적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또 훌륭한 외식업소 메뉴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나마 인천에 해장국 전통을 이어오던 신포동의 답동관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 애석하게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그나마 숭의동의 평양옥이 홀로 남아서 구수한 옛 토장국 맛을 전하고 있다. 애초 몸에 남은 술기운을 풀기 위해 먹는 국이 해장국이라고 하는데, 답동관은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이내 밤새 노름을 한 패거리들이 이 방 저 방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들이닥치던 곳으로 유명했다. 유씨 성을 가진 그 집 여사장의 마음 풍족하고 너그럽던 모습이 떠오른다.

 

=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사진=황경진 인턴기자 ssky0312@i-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