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음식·음식점 上 냉면·비빔밥 … 인천, 근대식 외식업소 발상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0-06-27 21:01:01
냉면·비빔밥 … 인천, 근대식 외식업소 발상지
3. 음식·음식점 上
이것이 꼭 자랑거리이고, 박수를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천은 근대 한국 대중 음식의 ‘선구지(先驅地)’였다고 자부한다. 정식 외식업이 발상(發祥)한 곳이면서 특히 평양냉면 같은 한 지역의 특정 향토 음식을 사계절 정식 외식업 품목으로 발전시켜 오늘날 전 국민이 즐기는 대중음식이 되도록 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여기저기 몇 차례 쓴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얼마간 미심쩍어하는 태도를 보인다든지, 아예 쇼비니즘으로 치부해버리거나, 또는 한가한 객담(客談)으로 웃어넘기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몇 종류의 음식은 개항을 통해 근대 한국의 중요 지점으로 부상한 인천의 운명과 여건에 의해 인천에서 발전, 전파되었음을 나는 거듭, 거듭 강조한다.
먼저 인천이 우리나라 외식업의 선구지였음을 증명하는 글부터 옮겨 보자.
“미두장을 중심으로 점심을 사먹는 인구가 부쩍 늘면서 냉면, 비빔밥, 장국밥 같은 비교적 고급인 식사를 제공하는 업소가 탄생했다. 평양관(용동), 경인관(용동), 신경관(경동), 사정옥(답동), 복영루(금곡동) 등이 번창했다. 주문받은 점심을 직접 현장에 배달도 했는데 값은 업소 내와 같은 20전(錢)이었다. 냉면 대접을 빽빽이 여러 그릇 겹쳐 놓은 긴 목판을 어깨에 메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달리는 배달꾼의 멋있는 모습은 한 폭의 거리 풍물화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는 종로에 몇 군데 설렁탕집이 있을 뿐 이러한 규모는 아니었다. 근대식 외식업소도 역시 인천이 효시이고 서울에 생긴 것은 조선박람회(1925년)부터였다.”
이 글은 우리 인천의 큰 어른으로 몇해 전에 작고하신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실린 구절이다. 그러니까 인천이 서울보다 앞선 1910년대, 1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전시 호황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인천미두취인소가 활기를 띠자 전국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미두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식사를 제공하는 업소’, 곧 외식업소가 생겨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업과 함께 인천에 숙박업과 유흥업도 동시에 발전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인천 외식업소의 대표적인 메뉴는 얼음을 넣어 육수를 차게 해서 먹는 평양(평안도 혹은 나아가 서도지방 일대)의 향토 음식 ‘모밀국수’(메밀국수)였다. 그 ‘모밀국수’가 인천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나 경위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천에서 정식 사계절 음식으로 발전, 외식 메뉴에 오르게 된 과정은 짐작할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모밀국수’가 인천 땅을 밟기 전에는 그저 서도지방(西道地方)의 겨울밤 밤참 별미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긴긴 겨울 밤 등불 밑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언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던 ‘모밀국수’라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시인 백석(白石)의 시에 보인다.
<전략> 낮배 어니메 치코에 꿩이라도 걸려서 山너머 국수집에 국수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는 짖는다//김치 가재미선 동치미가 유별히 맛나게 익는 밤//아베가 밤참 국수를 받으려 가면 나는 큰마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어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 백석, 「개」 일부, 시집 『백석 시 전집』
이 시를 읽으면 평양을 포함한 서도지방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야식(夜食)이 곧 ‘국수(’모밀국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치코에 걸린 꿩’이란 구절을 통해 ‘모밀국수’에 곁들이는 재료로 산골에 흔한 꿩고기와 함께 김치, 가재미선(가자미식혜), 동치미 등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다른 시에서는 ‘닭을 잡’거나 삶은 ‘돼지고기’를 넣는 등 제각각이다.
이것이 아마도 십중팔구 인천에서 소고기로 통일되었을 것이다. 인천은 당시 구미 각국의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여서 그들 선박에 공급하는 선식(船食)으로 소고기가 풍부했는데 그 때문에 소고기 편육이 자연스럽게 고명으로 오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거기다가 인천에 몰려온 일인 상당수가 냉면맛에 빠지게 되면서,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저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도 소고기가 쓰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차차 다른 고명의 균질화, 규격화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냉면은 그때도 겨울 음식인 평양냉면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국수와 곁들이가 비슷할 뿐 국물은 동치미가 아니라 육수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귀물(貴物)이었던 얼음덩어리가 들어있는 것이 신기했고, 사철 음식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또 다른 신 박사의 다른 저서 『먹는 재미 사는 재미』의 구절을 통해서도 인천 땅에서 외식 상품으로 모습이 변한 서도의 ‘모밀국수’를 살필 수 있다. 즉, 냉면에 얼음이 첨가되면서 겨울만이 아닌 여름에도 먹을 수 있는 사계절 음식이 되었으며 국물도 동치미 국물이 아닌 소뼈나 양지머리 등, 소의 부산물을 우려낸 육수를 붓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형(定型)이 없던 ‘모밀국수’가 인천에서 규격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도 소고기의 공급이 원활한 인천이어서 성립되는 이야기이고, 또 선박이나 생선 보관을 위해 얼음 공장이 세워진 인천이어서 가능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음식’을 본격적으로 ‘냉면’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 당시 외식업의 선구지 인천에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메밀국수류가 조선시대부터 즐겨 먹은 음식으로 추측된다지만, 여염(閭閻)에 냉면이라는 명칭이 통용되지는 않았을 듯싶다.
1936년에 발간된 백석의 시집 『사슴』에 나오는 몇 편의 시에도 모조리 ‘모밀국수’나 ‘모밀’ 혹은 ‘국수’로 되어 있지 냉면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냉면(冷?)’이란 명칭은 인천 외식업소에서 얼음을 첨가하여 전천후 상품화하면서 통용시킨 말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냉면에는 당연히 얼음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냉면은 여름 음식이라는 관념이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완전히 고착화 했다는 점이다. 말 할 것도 없이 ‘모밀국수’가 인천에서 변화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인천 사람들은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지만, “서울의 호사가나 한량들이 인천 냉면을 먹으러 경인기차를 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나 “서울에서 한량들이 장난삼아 사정옥에 냉면을 주문했더니 자전거를 타고 종로까지 배달을 했다.”는 등의, 다소 믿기지 않는 인천 냉면의 명성이 전해 온다. 1950년대 스무 그릇이 넘는 냉면 대접이 들어찬 긴 목판을 한쪽 손으로 받쳐 어깨에 얹고 반쯤 옆으로 뉜 자전거를 다른 한 손으로 잡고 페달을 밟던 광경은 지금도 아슬아슬 눈에 선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 시절 냉면집들은 이상하게도 문 앞에 긴 대나무 장대를 세워 끝에 하얀 종이 술이 달린 둥근 테두리를 매달아 놓았었다.
인천 냉면의 명맥은 내동이나 용동 일원의 몇 군데 업소가 이어 오다가 1950년대 이후 대부분 문을 닫고 말았다. 전쟁 후 먹고살기 힘든 때 속을 훑는다는 메밀 냉면을 사람들이 먹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 신포동의 강서면옥, 그리고 좀 더 뒤에 화신면옥 등 이름 있던 냉면집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오늘까지 남아 그 시절 맛 그대로 냉면을 내는 집은 내동 입구의 ‘경인면옥’과 숭의동의 ‘평양옥’이 있다. 물 대신에 나오는 경인면옥의 따끈한 육수는 그야말로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추억에 젖게 한다.글=김윤식 시인·인천문인협회 회장 사진=황경진 인턴기자 ssky0312@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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